나를 둘러싼 인연이 운명인지 종종 생각한다. 특히 책에 대해 고민했다. 학창시절엔 책과 나는 악연이었지만 지금은 운명이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다.
삶에서 쓴맛을 경험한 뒤로 책과 가까워졌다. 20대 중반부터 뭘 하든 되지 않았다. 하는 일에서부터 인간관계까지 잘되지 않았다. 마음에 병도 생겼다. 어떻게 할지 몰라 책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한 페이지 이상 집중하기가 힘들었고,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계속 나를 맴돌았다.
한동안 내가 잘하면 인간관계가 잘 될 거라 믿었다. 내가 상대를 좋게 대하면 나쁘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주는 만큼 돌아오지 않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경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나와는 다른 세상을 경험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게 책을 읽는 이유다.
고등학교 때 필독서로 읽은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그땐 줄거리만 대략 알았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열 살부터 스무 살 무렵까지 겪는 내적 변화와 성장을 다룬 이야기다.주인공 싱클레어는 다른 세상에 관심을 가졌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어둠의 세계에 묘한 끌림을 받고 데미안을 통해 그 세계를 이해했다.
내가 악마를 상상하면 저 아래 길거리에 있는 모습으로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변장을 했거나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냈거나 가설시장 혹은 술집에 있는 모습으로. 그러나 결코 우리 집에 있는 모습으로 떠올릴 수는 없었다. _헤르만 헤세 『데미안』
악마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밖이라고 나쁜 세계라 할 수 없고 집이라고 안전하지 않다. 누구나 나쁜 세계와 좋은 세계를 만나고 경험한다. 때로는가만히 있는 누군가를 내가 악마로 만들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이나 나쁜 점이 있다. 내게 좋아 보이는 사람도 누군가에겐 나쁜 사람이 될지 모른다. 나빠 보이는 사람도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이다. 나도 때로는 누군가에겐 악마가 되기도 한다.
나는 어둠 속 계단 맨 아래 칸에 앉았다. 한껏 웅크리고 앉아 불행에 몸을 내맡겼다. _헤르만 헤세 『데미안』
싱클레어가 불행에 몸을 내 맡겼다는 문장에서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문장의 세계가 나와 연결되어 마음을 덜컥 움직였다.
나는 어두운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있을 땐 스스로를 놓고 싶을 때가 있다. 마치 끝나지 않는 지옥이 이어지는 것 같다. 한동안 헤어나오기 힘들다.
나쁠 땐 운명을 탓했고 잘됐을 땐 당연한 줄 알았다. 지금은 다르다. 운이 안 좋다고 내 잘못이 아니다. 모든 일엔 다 정답이나 이유가 있지 않고 그냥 일어나기도 한다.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 없다.
내 안엔 어두움과 밝음, 슬픔과 웃음, 불행과 행복 같은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운명일 수 있고 때로는 악연일 수 있다. 악연이라도 내 힘으로 바꿀 수는 없다. 누구든 스쳐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나의 운명이다. 누군가와 어떻게 이어지든 결국 모든 끝은 나로 이르는 운명일테니.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않길 바란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지금처럼 삶에 의문을 품고 산다면 내 안에 다양한 세계를 만날 것이다. 언젠가 내 안에서 나보다 잘 해낼 어떤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아.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_헤르만 헤세 『데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