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누군가가 한 말이다. 충격이었다. 그 순간 그 사람에게 그게 바로 나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되묻고 싶었다.
그 당시 기운 빠져있는데 참 허망했다. 기운 빠지는 소리가 좋은 말이 아니지만 상대를 내 인생에서 뺄 필요까지 있을까.
요즘은 관계를 끊는 게 참 쉬운 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인연이라도 불편한 관계가 되면 거리를 두거나 당장 끊어버리라는 조언을 인터넷상에서 자주 본다.
처음 들을 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신경 쓰지 않아 편하다고 여겼다.
한 번은 친구와 싸워 몇 달 연락하지 않은 적이 있다. 수시로 생각났지만 먼저 연락하기에 자존심 상해서 하지 않았다. 다행히 친구가 먼저 손 내밀어 다시 관계가 좋아졌다. 사실 그동안 그 친구와 보낸 시간들이 그리웠다.
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이어오기까지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웃고 울고 한다. 상대에게 나의 단점을 보여도 어렵지 않은 관계가 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관계를 끊을 땐 이어갈 때보다 너무 단순하게 한 면만 보게 된다. 인간관계에 유효기간이 있다느니 진정한 친구는 몇 명이어야 한다느니 굳이 정할 필요가 있나 싶다.
여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꿈꾸는 부부가 있다. 소설 『다섯째 아이』의 주인공이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아이를 많이 낳고 싶었다. 네 명까지 낳았을 땐 그들이 원하던 가정으로 보였다. 원하지 않던 다섯째 아이인 벤을 가지고 아내인 해리엇이 예민해져 진정제까지 먹을 정도였다.
벤은 태어나자마자 이상한 행동을 했다. 난폭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개를 죽이고 야생적인 모습을 보였다. 박사에게 데려가 아이를 검사하니 정상이라 했지만 해리엇은 벤을 제어할 수 없어 결국 병원으로 보냈다. 해리엇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벤을 데려와 많은 노력을 했다.
‘내 말을 들어봐, 벤. 들어야만 해. 네가 얌전하게 굴면 모든 일이 다 좋아질 거야. 올바르게 먹어야 해. 요강을 사용하든지 변기가 있는 데로 가야 해. 그리고 소리치거나 싸워서는 안 돼.’ 그 애가 자기 말을 알아듣는지 그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반복했다. 그녀는 계속 반복했다. _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소설을 읽으며 벤의 행동에 많이 놀랐다. 누군가는 부모가 벤을 처음부터 싫어하지 않았냐며 부모 탓을 했고, 태어나면서부터 나쁜 짓을 한 벤을 탓했다. 유전인지 길러진 건지 잘 모르겠지만 부부를 탓할 수도 벤을 탓할 수도 없었다. 벤을 병원에 보낸 게 맞는지 다시 돌아온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육아가 어려운 가족에게 전문가가 솔루션 해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일명 금쪽이라 불리는 주인공 아이가 등장한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가 금쪽이에게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부모가 최선을 다해 키웠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난폭한 금쪽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무서웠다.
아마 금쪽이의 삶을 대신 살아보거나 그 가정을 깊숙이 알지 않는 이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벤은 소설 속 인물이지만 현실에서 있을 수 있다. 내가 모르는 시간을 살아온 금쪽이나 벤에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선택할 수 없듯이 아기를 갖는 일도 마찬가지랍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_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해리엇은 전문가를 만나 자신이 항상 죄인 같다고 했다. 그리고 벤이 다른 세계에서 온 게 아닌지 물었다. 그 정도로 마음이 곪아 있었다.
남편 데이비드는 벤을 만나게 된 이유를 찾으려 했다. 그들이 행복해지려 해서 벌 받은 거라는 말을 했다. 뭐든 이유를 찾으면 조금이나마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내 삶에 이유를 찾아도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일어난 이유를 다 알 수 없고 미리 막을 수 없었다. 내게 언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고통의 유효기간을 알 수 없다.
난폭한 아이가 내 가족이 아니라 남이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오히려 가까이 올까 봐 피할 것이다. 우리는 조금 불편하다고, 이익이 되지 않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서 종종 돌아선다. 아주 작은 면을 보고 그게 전부라 판단하기도 한다.
물론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나를 힘들게 하는데 관계를 유지하라는 게 아니다. 반복되는 문제라면 억지로 참지 않아야 하지만 단 하나의 잘못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분명 함께 걸어온 과정에서 고맙고 좋았던 적이 많았을 것이다. 상대의 실수만 보지 말고 좋았던 기억을 찬찬히 돌아보면 좋겠다.
기운 빠지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내 인생에서 빼기 전에 유효기간을 연장해 보면 어떨까. 나도 기운 빠지는 데에 한 몫하는 사람일 수 있고 그게 당신이 될 수 있다. 인생에서 확신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