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지는 않았으나 탈상의 의미로서 틀리지 않은 표현일 것이다. 주변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분이 언제쯤 이 슬픔이 괜찮아지냐고 하면 나는 3년을 말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속까지 의연해진 건 3년쯤 지난 어느 시점인 것 같았다. 아니 엄마가 그렇게 말한 것도 같다. 누군가, 소중했던 존재를 정리하고 평상시의 평온으로 돌아오기까지 3년이 걸리는 건 옛날 사람이나 현대인이나 사람이 지 보편적인 요소인가 보다. 1년은 애도의 틈도 없이 정신없이 지나고, 2년째는 감정의 기복이 있다가 3년쯤 되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 사람이 지닌 보편적 감정이려나.
이혼의 과정과, 이혼 후 겪은 에피소들 또한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망설이고 망설였던 시간이 3년. 문득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3년이 지난 후 비로소 자유로워지게 되는, 인간이 지닌 보편성을 나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이혼 3년이 되어서야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털고 싶은 것은 털고 싶어졌다. 맘먹기 시작했고 맘먹은 것을 실행에 옮겼다. 많이 생각하고 망설인 후의 결정인데도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뜬금없는 행동이 3년 동안 뜸을 들였다는 시간의 포인트가 신기하다. 존재에 대한 망각. 평안한 수용뿐 아니라 인생의 슬픔, 마음의 짐도 3년이 지나야 만 보다 평화로워지는 게 아닐는지.
슬픔과 아픔의 애도기간이란, 3년
표현을 시작하니, 묵은 감정을 쓰레기통에 버린 듯 후련해서 좋은데 가슴이 비워져서 그런지 오히려 더 슬프다. 감정 붙들고 있느라, 그거 붙들고 사느라 틈이나 여유가 없다가 풀어내자 빈 틈이 생긴 기분. 틈 속으로 몰랐던 감정들이 새롭게 스미는 낯섦.
꽁꽁 싸매며 부여잡던 일들을 맥없이 풀어내자 여린 속살이 외투 없이 드러난 것 같아 다시 들여다보며 점검하기도 한다. 맨 살이 쉽게 다치지 않도록.
심장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틈이 생겼다. 이제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라야 하건만
가벼워져버린 구석이 시려서 '이건 뭔가.' 이륙을 망설이는 중이다. 이제 곧 박차고 날아오를 만도 한데, 알 수 없는 매듭이 아직 발목에 걸린 기분이다.
과거를 돌이켜 물어보는 질문은 현재를 직시하게 만들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차차 알 수도 있다. 틈 사이를 또 다른 의미로 채우려 하지 말고, 박차고 날아올라 멀리 비상하지 말고 조금씩 걸음을 떼면 언젠가는 낮게 비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를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