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함께 사는 삶, 나누어야 할 무게

만약에 김지영 씨의 할아버지가 이혼소송 당했다면?

by 장유미 변호사
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라던 시절은 살아남기도 힘에 부치던 때였다. 전쟁으로, 병으로, 굶주림으로 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어 나가는 와중에 고순분 여사는 남의 농사를 지어 주고, 남의 장사를 팔아 주고, 남의 집 살림을 살아 주고, 또 본인 살림까지 알뜰살뜰 꾸려 가며 악착같이 사 형제를 건사했다. 얼굴이 하얗고 손이 고운 할아버지는 평생 흙 한 줌 쥐어 보지 않았다. 가족을 부양할 능력과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계집질 안 하고, 마누라 때리지 않은 게 어디냐고, 그 정도면 괜찮은 남편이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출처⟫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민음사, 2016. 26p




여자와 남자가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집에서 같이 살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인 생활(의식주)을 함께 꾸려가고,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일들을 서로 돕게 됩니다. 부부사이에 이러한 생활상의 관계는, 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정해진 의무입니다. 동거의무, 부양의무 그리고 협조의무. 소설 속 김지영 씨 할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고 손이 곱고 평생 흙 한 줌 쥐어 보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계집질을 하거나 마누라를 때리는 등 당연히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와 더불어 꼭 해야만 하는 행동인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부양은 오롯이 할머니의 몫이었죠. 두 사람이 이로 인해 갈등을 겪거나 이혼하는 결말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만약에, 소설과는 달리 할머니가 생계를 함께 책임지지 않는 할아버지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혼소송을 제기하였다면, 법원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요?


결혼은 자유지만 이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결혼 후 혼인신고를 한 순간부터 남남이었던 두 남녀는 부부라는 법률제도 안에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생활에서 당장 큰 변화를 실감하지는 못하겠지만, 가족관계등록부에는 서로가 배우자로 기재되고, 주민등록등본을 통해 동일 세대로 묶이며, 혼인 중 취득한 재산은 공동재산으로 취급되고, 자녀를 출산한 경우 공동 친권자가 되는 등 대단히 복잡한 관계로 얽히게 됩니다. 부부가 헤어질 때 그 뒤얽힌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법이 개입됩니다.


이혼(離婚)의 한자를 살펴보면 떠날 리(離) 자가 보입니다. 무언가 익숙한 것이 나에게서 떠난다는 것, 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 좌절과 상실감과 함께 옵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나와 백년해로를 서약했던 배우자라면 어떨까요? 이혼 이후에 펼쳐질 삶의 변화는 천지개벽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그 사건의 영향은 이혼을 하는 당사자뿐 아니라 결혼을 둘러쌓고 형성된 가족공동체라는 사회제도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법은 이혼하려는 사람들에게 폭넓은 자유를 줄 수 없었습니다. 재판으로 이혼을 하고 싶다면, 부정한 행위, 악의의 유기, 배우자나 직계존속으로부터의 심히 부당한 대우, 자기의 직계존속이 배우자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 3년 이상 배우자의 생사 불분명,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경우 중 최소한 1가지에는 해당되어야 합니다. 김지영 씨의 할아버지는 어떨까요?


저는 ‘악의의 유기’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악의의 유기’는 정당한 이유 없이 일부러 동거와 돌봄 등 생활의 책임을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김지영 씨의 할아버지는 ‘부양할 능력과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양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바로 악의의 유기로 판단되지는 않습니다만, 부양을 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었다고 하면 정당한 이유 없이 경제적 유기를 한 것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입니다. 할머니가 남의 농사를 지어 주고, 남의 장사를 팔아 주고, 남의 집 살림을 살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할아버지와 함께 짊어졌어야 했던 삶의 책임을 혼자 고스란히 떠안게 된 결과이지요. 가 이 사건의 판사라면 김지영 씨 할머니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부부간의 부양의 의무는 ‘서로’ 해야 하는 의무이기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해내야 하는 것도, 한 사람이 당연히 받기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이 아이를 키우기로 한 관계에서 그 기본적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괜찮은 남편’ 일 수 있겠습니까”


김지영 씨 할머니의 삶에서 발생할 수도 있었던 상황을 가정해서 이야기하였으나, 실제로 이 문제는 ‘생활비 미지급 이혼’으로 지금도 자주 논란이 되곤 합니다.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은 배우자의 단골 멘트는 “내 돈인데, 왜.”입니다. 그 말 안에는 결혼을 공동체로 보는 시선이 없고, 배우자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같은 공간에 머무는 사람으로 대하는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사는 일은 감정만이 아니라 책임까지 나누는 약속입니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맺어졌다면,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그 문장이 내게 말을 걸었다, 조용히.

그래서 써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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