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꼭 해야만 하는 일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다

성희롱 예방교육이 형식으로 전락한 그 순간, 사건은 꿈틀 되었다

by 장유미 변호사
김은실 팀장과 그나마 정신줄을 챙기고 있는 피해자 몇 명이 모여 여성 단체의 자문을 얻어 가며 대응하고 있고, 김은실 팀장은 원하는 여사원들을 싹 데리고 나가 회사를 차리려고 준비 중이다. 분명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남자 대표가 조용히 덮으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이 바닥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회사는 어쩌라는 거냐. 남자 직원들도 다 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는데, 사람 인생을 이렇게까지 망쳐 놓아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여자들 입장에서도 사진 나돌고 그런 거 소문나서 좋을 거 없지 않으냐. 또래 한국 남자들에 비해 감각도 생각도 젊던 대표의 입에서 너무 뻔하고 이기적인 자기 방어의 망발들이 쏟아져 나왔고, 김은실 팀장이 참다 참다 한마디 했다.

"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다는 건, 그런 짓을 용서해 줄 이유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대표님 생각부터 고치세요. 그런 가치관으로 계속 사회생활하시다가는 이번 일 운 좋게 넘기더라도 비슷한 일 또 터집니다. 그동안 성희롱 예방교육 제대로 안 한 건, 아시죠?"

⟪출처⟫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민음사, 2016. 155~156p




회사에 소속된 근로자가 어떤 행위를 한 경우 그것이 회사의 업무와 관련이 있다면, 그 근로자의 사용자인 사장님이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원래는 사장님이 혼자서 해야 하는 일들이지만, 물리적 제약상 혼자서 할 수 없는 업무들을 근로자들을 통해서 확장시킨 것이니까요. 12화에는, 김지영 씨 전 회사의 남자직원들이 여자화장실에 불법으로 설치된 몰카에 찍힌 직원들의 사진을 돌려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소적으로는 회사 내에서, 시간적으로는 근무시간 중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회사의 업무와는 무관한 개인의 일탈로 보이지만, 과연 사장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직장 내 성희롱이 성립하려면 ‘직장 내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되어야 합니다. 엄격한 잣대를 내민다면, 불법촬영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남자 동료들과 돌려본 행위에 직장 내 지위를 이용하였다거나 업무와의 직접적 관련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업무관련성 요건을 비교적 포괄적으로 해석하는 법원의 입장을 고려하면,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정될 가능성 또한 없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입장을 견지한 채, 이야기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김은실 팀장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대표에게 ‘분명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남자 대표가 조용히 덮으려고만 했다고 합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세상에는 분명 존재하지만, 간절한 바람과는 무관하게 어느 날 그것들은 현실이 되어, 믿기 어려운 참혹함으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말문이 막히고, 기가 차는 일들을 겪을 수도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계속 진화를 거듭하면서 지금과 같은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회복을 위해 기울인 노력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이에 대한 사과, 재발 방지 대책의 마련과 그 시행 등등, 불완전한 개인이 모인 불완전성의 최고집합체인 인류가 거시적으로는 나선형 방향으로 나아지는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러한 자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설에서의 상황은 어떠한가요? 회사 내에서 벌어진 일이 근시일 내에 또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건 저만의 느낌은 아니겠지요.


사장님은 남자 직원들이 불법촬영물을 돌려보는 행위를 몰랐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직원이 알게 되었고 경찰신고까지 이루어져 공론화된 상황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시점에 사장님은 분명하고도 단호한 조치를 취했어야 합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조사를 하고, 피해 근로자를 보호하는 조치(근무장소 변경, 유급휴가 부여 등)를 취했어야 하며, 가해가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었을 때는 이들에 대한 징계, 근무장소 변경 등의 조치도 했어야 합니다. 사장님은 어느 것도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로 사장님은 각 행위별로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처벌받았을 겁니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김지영>을 연재하면서 거듭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법에서 부여한 의무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것으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제재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왜 이런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까에 대한 의문은 김은실 팀장의 마지막 대사에서 풀렸습니다. 조직의 규모와 상관없이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인데, 그 리더가 성희롱 예방 교육에 무심했던 것이 비극적인 사건의 시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업주는 연 1회 이상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하여 교육을 실시하여야 합니다. 이는 법정필수교육인데, 법은 사업주들이 형식적인 교육에 그칠 것임을 이미 예견하고 우려하였나 봅니다. 그래서, 단순히 교육자료 등을 배포/게시하거나 전자우편을 보내거나 게시판에 공지하는 데 그치는 등 교육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이 곤란한 경우는-그 어떤 여지를 두지 않고-예방 교육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상시 10명 미만 고용 사업장, 어느 한 성(性)으로만 구성된 사업장 제외). 소설에서 사장님이 성희롱 에방 교육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모습이 어땠는지 더 이상의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아마도 교육을 한 척 위장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교육은 과연 인식의 변화와 범죄 예방에 얼마나 효과적일까요? 많은 기업의 인사팀은 교육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지만, 실질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달성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무용하게 보이는 교육은 왜 계속되어야 할까요? 그건 아무래도,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메시지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토대로 의식에서 무의식으로의 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교육의 목적은 수료증 한 장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내용이 우리의 말과 태도, 삶의 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비로소 그 가치를 다했다고 할 수 있지요.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1,500여 개의 법률이 존재하지만, 그 수많은 법들 속에서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정한 교육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개인정보 보호교육, 산업안전보건 교육, 그리고 퇴직연금 교육 정도입니다. 성희롱 예방 교육이 법정필수교육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이 교육이 얼마나 깊이 있고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 모두가 다시금 새겨보아야 할 이유가 아닐까요.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그 문장이 내게 말을 걸었다, 조용히.

그래서 써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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