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다.
이제 암수술쯤은 열두 번도 더 할 수 있겠다.
항암을 해보지 않은 자! 인생을 논하지 말라~
날 사람 만든 건 항암이었다!
살아야겠다.
살이 점점 빠져 갔다.
살만 빠지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도 피폐 해져 갔다.
이건 사는 게 아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사람은 일을 해야 해!
난 하이브레인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낙심했다.
결혼, 임신, 출산, 수술로 4년간의
연구실적이 ’ 0‘이었다.
게다가 난 박사논문도 아직 안 썼다.
그렇다.
난 결혼 전 대학에서 강의하는 거 외에는
해본 적이 없다.
다시 복귀하고 싶었으나 현실의 벽은 냉정했다.
현실을 자각한 나는 더 피폐 해져 갔다.
나한테는 일이 절실했다.
무언가 해야 지금의 이 잡다한 생각들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마트 캐셔를 알아볼까도 생각했다.
내 친구가 말하길.. 너는 안 된단다.
어린아이가 있는 엄마들은 써주지 않는단다.
내 평생에 고작 3년을 쉬었을
아니 출산과 육아를 했을 뿐인데
경단녀였다.
한 한 달쯤..
내 주제 파악을 아주 깊게 하고 있는데
아는 선생님한테 연락이 왔다.
강의자리 소개였다.
그 선생님 앞에서 호들갑은 떨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오~신이시여~!’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했다.
하루에 6시간, 3시간씩
밥을 먹으면 곧바로 내보야줘야 했기에
항상 배가 홀쭉했다.
밖에서 먹는 밥은
다 먹을 수도 천천히 먹을 수도 없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살이 얼마나 빠진 걸까?
맞는 옷이 없었다.
옷을 사러 ZARA에 갔다.
XS이 컸다.
어릴 적
평생 한번 말라보는 게 소원이라 말 한적 있는데..
소원성취 한 셈이다. ㅠ
하루에 6시간씩 강의하고 오면
난 첫째 딸 책을 4~5권씩 읽어줬다.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힘들었지만
나에게 에너지가 생기며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아이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읽어줬다.
건강한 엄마를 만나지 못한..
그리고 엄마가 일찍 떠날 수 있다는
체험을 해 보았으니
나의 육아 목적은 더 뚜렷해졌다.
육아의 목적은 ‘독립!’이었다.
난 딸이 8월 첫 주에
핑크색 오리털파카를 꺼내달라고 떼쓰면
꺼내주었다.
아시겠지만 첫째 딸 고집을 누가 말리랴..
그리고 입혀서 데리고 나갔다.
5분도 안 돼서 벗겨 달라고 한다.
앗! 주변 사람들이 보고 내게 온다.
(으~~~ 창피했다ㅠ)
그리고 칭찬하셨다.
엄마가 현명하다고..
난 아이를 말리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았고
아이 스스로 느끼게 해 줬다.
왜 엄마가 안 된다고 했는지..
본의 아니게 받은 칭찬은
나에게 신념이 되었다.
또 한 번은
공원길에서 딸이 넘어졌다.
난 얼른 나무 뒤에 숨었다.
숨어서 지켜봤다.
아이는 ‘이~잉’ 하려다가 엄마가 없는 걸 확인하고
금방 일어나서 뛰었다.
지나가던 점잖은 노부부가 얘기하는 게 들렸다.
‘엄마가 애를 잘 키우네~’
두 분이서 하는 대화였지만
나무 뒤에 숨어있던 나를 뿌듯하게 하셨다.
내가 이러는 데는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 몸을 움직이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다.
특히 앉았다 일어나기나 손 쓰는 일..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손이 굳고
뼈마디가 아팠다.
류마티스가 의심되는 상황 ㅠ
난 또 대학병원에 예약을 했다.
병원은 이제 나한테 아주 친정 같은 곳이다. 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