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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_희망사항

by 강아지똥

기억을 한 입 베어 물고 쓰면, 기억은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내게서 나왔지만, 쓰는 동안 나에게서 멀어진다. 쓰는 동안 뾰족했던 부분들은 막으로 감싸진다. 글을 쓰고 나면 나는 기억을 삼켜버린다. 하지만 최근 기억들은 쓰고 나서도, 뾰족하다. 잘 감싸지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쏟아지고, 길어지는 글이 버거워진다. 삼켜지지 않는 기억들은 쓰고 나서도 찝찝하다.


글을 쓰면서 잊고 있었던 내 더듬이가 만져졌다. 더듬이는 잘려있었다. 잘린 건지, 자른 건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랬다. 그런데 엄마가 된 나는 조바심이 난다. 혹시 잘린 더듬이 때문에, 내가 아이의 더듬이를 자르거나 아이가 스스로 더듬이를 자를까봐. 잘린 더듬이를 다시 매만진다. 아이의 더듬이를 감지할 수 있도록 잘린 더듬이를 다시 움직인다.


눈을 감고 기억을 만든다. 이야기로 만들어 씹는다. 상상한 기억을 씹어 삼키며 희망을 꿈꾼다.


<희망사항>

잠겨진 방문 틈 사이로 종이가 들어온다.

‘아까는 엄마가 미안해. 너 때문에 화난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할머니 전화 받다가……, 엄마가 감정 조절이 안 돼서 그랬어. 정말 미안해.’

엄마는 매번 이런 식이다. 어릴 때 엄마와 서로에게 편지를 써주던 노트가 있었다. 엄마의 편지는 대부분 내 마음을 몰라 주어서,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때의 나는 괜찮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엄마와 나를 응원하는 말로 편지를 채웠다. 언젠가부터 쓰지 않게 되었고, 노트는 책장 한구석에 오랫동안 꽂혀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엄마는 말보다는 편지가 편한가 보다.


나는 일기장에 ‘엄마는 모순덩어리다’라고 적었다. 엄마도 말로 표현을 잘하지 못하면서, 나에게는 매번 말하라고 다그치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항상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말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엄마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말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어른인데도 매번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화를 낸다. 나중에 미안해할 거면서 왜 자꾸 그러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정말 이해해주고 싶지 않다.


오늘도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 난 왜 이렇게 자는 게 힘든 걸까.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이 항상 불안하다. 엄마는 오늘도 빨리 자야 한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했다. 나는 요즘 마음이 정말 힘든데, 엄마는 관심도 없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지 못한다. 노트를 펼치고 엄마가 써준 편지들을 다시 읽어본다. 일기장을 펴고 ‘엄마도 처음’이라는 말과 ‘엄마와 상관없이도 난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라는 말을 옮겨 적었다.


학교에 도착해서 가방을 열었더니 오랜만에 노트가 들어 있었다.

‘넌 더듬이가 많은 걸지도 몰라. 그래서 남들보다 많이 느끼고, 알아차리게 되는 거지. 알지 않아도 되는 것들도 알게 되니까, 힘들기도 할 거야. 그렇지만 어떨 때는 남들보다 빨리 알아차릴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어. 빨리 알게 되면 주변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행동할 수 있잖아. 또 많이 알게 되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보이기도 하니까. 네 말처럼 누군가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

다른 사람들도 너처럼 특별한 것들이 하나씩 있을 거야. 그 특별함 때문에, 좋은 점도 힘든 점도 모두 가지고 있겠지. 요즘 엄마 아빠에게 속상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많지? 매번 미안하다고 해서 미안해. 그래도 계속 미안한 일이 있으면 미안하다고 할게. 그리고 엄마가 밉고 화나고 하는 그런 마음들도…… 다 괜찮은 거야. 그 말을 해주고 싶었어.’


엄마에게 답장은 쓰지 않을 것이다. 요즘 엄마, 아빠의 말은 무조건 삐딱하게 들린다. ‘아니’란 말이 자동으로 나온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받아들이는 건 내 마음이다. 그래도 엄마의 의견은 참고할 만하다. 좋은 점과 힘든 점이 함께 있다는 것이 마치 엄마가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한 나의 마음과 닮아있다. 일기장에 ‘더듬이’와 ‘괜찮다’라는 말은 적어 두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모순된 감정과 상황은 나에게도 있다.’ 엄마는 편지 마지막에 흔들리는 글씨로 덧붙여 썼다.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힘들고 아프다고, 너의 그 소중한 더듬이를 자르면 안 돼. 알겠지?’

나는 일기장에 다시 덧붙였다.

‘엄마도 더듬이가 많았을까?’,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때 엄마는 어땠을까?’,‘ 할머니와 엄마는 어땠을까?’, ‘얼마나 힘들고 아프면 더듬이를 자르게 되는 걸까?’


나는 오늘도 방문을 잠근다. 그리고 엄마는 내 방문을 두드린다.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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