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는 나의 첫 학생이다. 아이가 4학년 때 ≪사거리 문구점의 마녀 할머니≫라는 책을 읽고 수업을 했다. 여러분의 주변에도 행운의 마녀 할머니와 같이 위로와 용기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소개하여 봅시다라는 질문에 같이 수업을 받던 친구들은 대부분 자신의 엄마를 적었다. 나의 딸은 담담하게 자신이 쓴 글을 읽었다.
“저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저를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사람은 없지만, 제가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될 겁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저를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사람이 생길 겁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한참 동안 아이가 쓴 글을 쳐다본다. 아이가 쓴 첫 문장이 마음에 박힌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제안했다.
“엄마가 이제 안아줄게. 우리 말없이 서로 안아주는 시간을 갖자. ”
“하루에 몇 번 안아주는 거야?”
“글쎄, 일단 학교 다녀오면 안고, 음…….”
“열 번? ”
“열 번이나! 그건 너무 많지 않아. 다섯 번만 하자.”
이후 아이는 수시로 “안아줘”라고 말했다. 시작하고 얼마쯤은 안아달라는 아이를, 두 팔 벌려 꼭 안아주었다. 아니 안아주려고 노력했다. 몸의 거부 반응을 누르며 안아주는데도 아이는 만족하지 못했다. 열 번을 넘어 계속 안아달라고 요구했다. 나의 ‘안아주기’는 준비가 필요하다. 아이는 나의 마음과 감정 상태를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 안아줘.”
“그만!”
“왜 안 안아주는데. 안아주기로 했잖아?”
“그래. 그러기로 했지. 그런데 엄마가 잘 안 돼서 그래.”
아이는 입을 내밀고 실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안고 싶으면 그냥 와서 안고 가면 어때? 엄마도 마음은 안아줘야지 하는데, 잘 안될 때가 있어. 네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야. 안아주기 싫은 것도 아니긴 한데……. 하여튼 그냥 네가 안고 가. 알겠지?”
‘안아주거나 안기거나’를 시작하고 얼마 후 아이의 책상에서 포스트잇을 보았다.
‘나는 빛나는 돌멩이야.’
5학년 겨울 방학이 되자 아이는 방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6학년이 된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다. 꼭 안아주기로 마음을 먹는다. 안아준다. 아이가 방문을 열고 또 나온다. 또 온다. 또. 또!
대략 다섯 번에 두 번은 안아주고, 세 번은 안긴다. 그중 한두 번은 경직된 채 안김을 참다가, 이제 그만이라고 외친다.
“너 아직도 빛나는 돌멩이지? 난 그 말이 참 좋더라. ‘빛나는’과 ‘돌멩이’가 잘 어울려.”
“엄마, 나 이제 돌멩이 아니야. 돌멩이는 너무 하찮잖아. 말하고 나니 하찮다는 말이 미안하네. 돌멩이는 흔하니까.”
“누구에게 미안하단 거야? 그럼 이젠 뭔데?”
“음……. 철광석이야, 철광석.”
“철광석?”
“철광석은 단단한데 녹이면 여러 군데 쓰이는 데가 많잖아.”
“그럼 빛나는 철광석이겠네.”
“아니, 철광석에 ‘빛나는’은 어울리지 않아.”
“그래? 그럼 앞에 뭘 붙여야 할까?”
앞에 뭘 붙이고 싶은 나와 달리, 아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도 아이는 하루에 몇 번씩 나에게 말한다.
“안아줘! 엄마 안아줘.”
“네가 필요하면 안고 가면 되잖아. 왜 매번 안아달라고 해.”
“엄마! 이제 좀 있으면 엄마가 안고 싶어도 나 못 안는 거. 알지?”
아무리 해도 안아주는 것에 능숙해지지 않는다.
아이는 그런 나를,
자기가 원하는 만큼 ‘안아주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