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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거리 소설가 Nov 21. 2024

(단편소설) 꿈속에서(完)

 나는 지금 걷는다. 발아래 흙의 감촉이 느껴진다. 좁쌀 만 한 흙이 알알이 내 발바닥을 훑는다. 그 감촉이 내 모든 오감과 신경을 곤두세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만든다. 작은 돌 하나가 발바닥을 스친다. 나는 그 감촉을 놓치지 싫어 돌을 지그시 눌러본다. 모래와는 또 다른 감촉이 나를 감싼다. 신발을 신지 않고 흙길을 걸을 때, 처음의 불쾌감만 참는다면 꽤 괜찮은 소일거리다. 걸을 때도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발아래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걷는 다면 더할 나위 없는 유희를 제공한다. 며칠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책만 하고 있는데도 나 스스로가 하릴없이 돌아다닌다고 생각지 않는다. 눈을 감고 다시 그 감촉을 느낀다.    

 

 한동안 작은 돌을 밟고 선다. 누구도 내 모습을 나무라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나뭇잎의 퀴퀴한 향기가 내 코를 찌른다. 싫지 않은 기분이다. 조금 더 향기에 집중하자, 이번에는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라 어떤 새가 내는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맑고 청하 한 소리다. 소리를 쫓아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지만 새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새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다 문뜩 10년 전 기억의 상자 속 한편에 버려진 낡고 누추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잊고 싶은 기억이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플롯소리와 새소리가 겹쳐 들린다. 너무 괴롭다. 귀를 막는다. 두 귀를 막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이제는 발의 감촉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흙길의 끝 무렵에 다 달았을 때, 비로소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나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풀밭이 펼쳐진다. 더 이상 흙길을 걸을 수 없다. 그렇다고 새소리가 나는 뒤로 돌아갈 생각도 없다. 나는 무수한 나무들과 그 아래 포근한 흙길을 뒤로한 채 광활한 풀밭으로 나간다.    

  

 풀밭에 들어오자 대지의 지평선이 끝 모르게 펼쳐진다. 눈앞에는 초록의 풀밭과 강렬한 태양 그리고 그 옆에 거뭇한 구름만 보인다. 나무가 가려주던 그늘막이 없어지자 갑작스레 열기가 확 올라온다. 풀밭도 태양의 열기에 데워졌는지 발의 감촉이 미지근해졌다. 완연한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순간의 태양만큼은 여름의 위용을 떨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통에 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덥지는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아까의 흙길이 조금 선선하다 못해 조금 차가웠다면 지금의 풀밭은 미지근한 물에 들어온 느낌이다. 풀의 감촉은 푹신하다. 흙이 내 발을 간지럽게 했다면, 풀은 내 발을 감싸고 있다. 더 푸근한 느낌이다. 한 발자국씩 풀을 밟고 나아간다. 한참을 걷다 보니 비릿한 향이 내 코를 찔렀다. 냇가다.   

   

 내가 흙길을 걷고, 풀밭을 걸은 이유는 냇가에 다다르기 위함이었다. 나는 비릿한 향이 나자마자 풀밭을 빠르게 걸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작은 냇가가 그곳에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폭이지만, 물은 맑아 안이 훤히 보인다.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시냇물의 유속에 반(反)하여 물가를 오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물고기들은 그것이 유희일 것이다. 나는 발을 냇가에 담가본다. 시원하다. 순수한 시원함이다. 흙의 꿉꿉한 시원함이 아니다. 풀의 미지근함이 아니다. 발의 모든 감촉을 마비시키는 순수한 차가움이다. 내가 발을 물에 넣자 호기심 많은 어린 물고기들이 내 발 주위로 몰려든다. 그것이 퍽이나 재밌어서 나는 약간의 물장구를 쳤다. 어린 물고기들은 그것도 재밌는지 돌아가는 척을 하다가 다시 내게 온다. 나는 아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왼손에 들고 있던 신발을 옆에 잠시 두고, 두 손으로 크게 물을 떠본다. 손 안에서 찰랑거리는 물을 한 번 보내준다. 나는 다시 냇가의 물을 뜬다. 이번에는 물을 바로 버리지 않고, 내 얼굴에 보낸다. 시원한 물이 내 얼굴을 자극한다. 하지만 강렬한 태양에 그 시원함도 잠시, 내 얼굴을 차가운 열기가 모두 빠져나간다. 나는 다시 물을 뜬다. 그리고 내 긴 머릿결을 적신다. 푸석푸석한 머릿결이 갑자기 촉촉해지면서 적셔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몇 차례 반복하니 머리가 푹 적셔진다. 기분이 상쾌해진다. 불현듯 아까의 새소리가 들린다. 분명 지금 주위에는 물고기 밖에 없다. 다시 20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녀가 부른 플롯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그 기억을 떨치기 위해 나는 다시 얼굴을 물에 적신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은 물을 뜬다. 갑자기 어두위지면서 더운 열기가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회색빛 세상에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본다. 거뭇한 구름이 태양을 가린다. 여름의 위용을 뽐내던 태양도 작은 물방울 알갱이들한테는 안 되는 모양이다. 더운 열기가 사라지며 주변은 삽시간에 추워진다. 계속 불어오던 서늘한 바람이 한기를 가지고 오기까지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냇가에 발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젖은 머리의 물기를 빼기 위해 머리카락을 잡고 수건 짜듯이 짜는 시늉을 한다. 생각보다 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얼추 빠진 것 같기는 했다. 일어난 김에 냇가를 따라 아래로 걷는다. 다행히 풀은 아까의 온기를 머금고 있어서 그렇게 차갑지는 않다. 검은 구름은 태양을 피해줄 생각이 없는지 계속 거기에 떠있다. 조금 있으면 비를 뿌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차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내리는 비를 보고는 피식 웃음이 나온다. 5년 전 그날도 비가 내렸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웃음이 난다고 생각한다.  

    

 비를 맞는 것은 기분이 좋다. 나쁘지 않다. 풀 사이사이에 물방울이 알갱이가 되어 맺혀있고, 그 위를 걷는다. 끝이 보이지 않은 풀밭에 내가 서있는 곳이 중간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더 이상 걷지 않는다. 그냥 그곳에 서서 비를 흠뻑 맞는다. 서늘한 바람이 비를 데리고 내 몸을 휘감는다. 나는 바람소리에 맞혀 흥얼거린다. 좋은 음색이다. 이제는 팔을 펴고 하늘을 품으려 한다. 내 얼굴은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본다. 눈을 감는다. 눈꺼풀에 비가 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톡톡 거리며 내 눈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나쁘지 않은 촉감이다. 하지만 축제는 바로 끝난다. 비가 멎었기 때문이다. 비를 흠뻑 내린 검은 구름은 이제 태양에게 그 자리를 물려야 할 차례다. 다시 태양의 열기가 내 몸을 감싸고는 나를 적셨던 비의 요정들을 날려 보낸다. 이제는 춥지 않다. 다시 더워진다. 그래도 계속 냇가를 따라 풀을 걷는다.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미진아, 너 지금 거기서 뭐 해?’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나를 부를만한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또 들린다.     


 ‘미진아, 얼른 돌아가야지’     


 이번에는 좀 더 앙칼진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애써 무시하지만 계속 내 귓 전을 때리는 목소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다는 소리 내어 말한다.     


 “나는 돌아가지 않아. 그냥 여기서 살래”

 ‘안돼!, 이제는 돌아가야 해’     


  마지막 목소리가 들리고 갑작스레 ‘쿵’하더니, 나는 다시 눈이 떠졌다. 이미 눈을 뜨고 있었는데, 다시 눈이 떠졌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시 눈이 떠진 곳은 흰색의 천장이 보인다. 옆에는 이름 모를 기계들이 즐비하고, 나는 푹신하지 않은 어떤 곳에 누워있는 것 같다. 갑자기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까 맡았던 나뭇잎의 냄새와 비슷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옆에 누가 엎드려 누워있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 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최대한 올려 누워있는 누군가를 건드린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는다.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하나도 이해 못 할 상황 속에 내 손짓에 일어난 사람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밖으로 나가며 크게 소리치는 말 뿐이었다.      


 “아이가 깨어났어요”     


 그 말은 메아리치며 내가 있는 공간에 퍼지듯이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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