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조금 빨리 움직이지 못했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하기 위함이다. 그날도 오늘과 같이 잿빛 안개가 짙게 드리웠었다. 아침 해가 채 뜨기도 전에 나는 좁은 골목들을 지나 허름한 창고 앞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외투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차가운 입김만을 수없이 불어댔을 때, 그가 꼬박 1시간 하고도 30분이나 지나서 그 곳을 나왔다. 그는 나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잊은 것인지, 나를 보고는 꽤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시간을 지키지 않았음에 대해 타박을 하자,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변명했다. 그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밤새 먹고 마셔댔을 것으로 보이는 술과 음식의 역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그를 향해 몇 마디 더 쏘아 붙인 후 그에게 부탁한 것을 가져왔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대신 ‘씩’ 웃으며, 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두 번 두드리고는 이내 외투 안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서 건넸다. 그의 투박하고 거친 손이 내 살결에 닺자 나는 움찔한 채로 반대 손을 이용해 그의 손에 든 봉투를 낚아챘다. 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제 마작을 해서 돈을 얼마나 땄는지‘와 같이 하등 궁금하지 않은 내용들을 주저리 거리며 떠들어 댔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곤, 그에게 ‘흰 봉투’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채로 다시 작은 골목들 사이로 향했다.
그 곳을 빠져나오면서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그가 자신을 쫓아오지는 않는지도 확인했다. 다행히 나를 쫒아 오는 사람은 없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큰 길로 합류하자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기에 그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안정을 찾았다.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나를 맡겼다. 그렇게 한 참을 걷자 작은 카페가 하나 보였다. 그 곳으로 얼른 들어가 따듯한 음료를 시키고는 자리에 앉아 ‘흰 봉투’를 열어볼 찰나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두리번거리며, 손님이 거의 없는 카페 안을 살펴보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나는 잽싸게 ‘흰 봉투’를 외투에 다시 넣고는 태연스럽게 커피를 홀짝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이 썩 자연스럽지는 않았는지, 그 남성 중 한 명은 내 옆에 섰고, 나머지 한 명은 나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댓구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있던 남자가 내 어깨에 손을 잡으며 겁박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울먹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서있던 남자가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강제로 외투를 벗겼다. 그 옷은 다시 앉아있던 남자에게로 전달 됐다. 앉아있던 남자는 일어서서 동료로부터 내 외투를 건네받아 이곳저곳 살펴봤다. 그리고 안 주머니에서 내가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흰 봉투’가 그 남자에 손에 들어갔다. 그 남자 중 한명이 나를 보고는 조롱하듯 놀려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흰 봉투’를 지키지 못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남자 둘은 나를 앙 옆으로 포위하고는 나를 질질 끌고 밖으로 향했다. 그들은 내 눈을 검은 붕대로 가리고는 차에 태워 끌고 갔다.
차가 멈춘 곳에는 앞선 손님이 와있는지 비명소리가 들렸다. 곧 그 비명 소리는 내게 내리는 철퇴와 같이 가슴에 꽂히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게 쓰인 두건을 풀었다. 갑작스런 밝은 빛에 눈살을 찌푸리자 멀끔한 양복차림의 한 남자가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의 묵직한 음성에 합죽이가 된 것 마냥 조용히 고개만 떨구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가 좀 더 강력한 어조로 내게 말했지만 그 때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에서 내 아이의 이름이 나오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알게 됐다. 내가 왜 중간에서 ‘흰 봉투’를 가로 챘는지, 그리고 누가 사주했는지 까지 모두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나는 주변이 보였다. 나를 마주보는 남자 뒤에는 어렴풋이 사내의 하체가 보였다. 내가 하체만 보고 사내라고 생각한 이유는 오늘 새벽에 내게 ‘흰 봉투’를 건넸던 남자의 신발과 똑같은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사내를 뒤로한 채,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는 지금 나와 마주하는 남자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실토할 때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곳의 총 책임자로 보이는 그 중저음 목소리의 남자는 내 대답이 충분히 흡족했는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앞에서 미소까지 지었다. 나는 이 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러자 나와 처음 마주했던 검은 양복의 사내가 따듯한 커피와 내가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챙겨왔다. 아마, 총책임자였던 그 남자의 지시사항인 듯 보였다. 갑작스레 베푸는 친절에 어리둥절해서 커피를 내게 쥐어준 검은 양복의 사내에게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어정쩡하게 앉아서 커피를 들고만 있었다. 따듯했던 커피는 바깥의 찬 공기에 점차 식어갔다. 한참 자리를 비웠던 총책임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가 나를 빤히 보더니 웃고는 이제 가보라고 했다.
그의 한 마디에 일단은 죽어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저들이 나를 풀어주는 데는 굳이 자신들 손이 피를 뭍이지 않아도 내가 불었던 사람들에게 알아서 제거될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뻤다. 얼마간의 달콤한 삶이 연장됐으니 말이다. 한 편으로는 집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됐지만, 오늘 당장 해외로 보내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실토했던 사람들도 나에 대해서 조치를 취한 들 못해도 이틀에서 삼일은 걸리니까 말이다.
나는 그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곳을 뛰어서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퇴근시간이 아님에도 집으로 들어온 나를 보고 놀라는 아내와 아이에게 당장 해외로 떠나라고 말했다. 당황한 표정을 지은 아내는 궁금한 것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내 단호한 행동 때문에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둘의 출국까지 확인하자, 온 몸의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쓴다. 이제 나는 내가 실토한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죽을 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그 총책임자 같은 놈이 더 기민하게 움직여서 그 들을 먼저 처리해 줄지도 모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후자가 낫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비록 나는 실패했지만, 내 목숨을 내 던질 마음은 조금도 없다. 나는 살고 싶고, 그렇기 때문에 도망하기로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보게 되는 사람이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누구든 나를 찾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