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땀을 잔뜩 흘린 태수는 몸부림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아내 미진도 덩달아 일어나 그의 행동에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도 꿈꿨어?”
“응"
태수가 짧게 대답하고 침대 옆 탁상에 놓인 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시간은 오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미진도 그를 따라갔다.
“뭐 줄까?”
“물”
그의 이마에 아직 맺혀있는 땀들이 멋대로 떨어졌다. 그는 짜증이 난 듯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세차게 훔쳤다. 그러자 땀은 손을 타고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그녀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 그를 닦아주었던 수건으로 바닥을 닦았다. 그는 그녀가 챙겨준 물을 벌컥거리며 마시곤, 다시 정수기 앞으로가 한 잔 가득 물을 따랐다. 속이 타는 모양인지 몇 번을 그렇게 물을 마시고서야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아 바닥을 바라본 채, 허공에 말했다.
“미진아, 오늘은 내가 뭘 본 줄 알아?”
“뭔데?”
그녀는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그에게 답했다. 그러자 그가 초점 없는 눈으로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그녀는 아무 말하지 않았고, 그는 다시 꿈 얘기를 했다.
“오늘은 마트였어. 나는 너와 카트를 밀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 그런데 갑작스레 폭발음이 들렸어. 그것도 세 번이나, 마트 안은 지옥이었어. 여기저기 피 칠갑한 사람들이 우왕좌왕 거리며 뛰어다니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울고, 그 와중에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도 있고, 100명 남짓의 손님과 고객은 뒤엉켜서 죽어갔어. 방화범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범인이 영악하게 출입구마다 폭탄을 설치하고 불을 질렀어. 사람들은 나갈 수가 없었지. 금세 연기는 차올랐고,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 까지도 한두 명씩 쓰러지기 시작했지, 나는 네 손을 꼭 잡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는 껴안은 채 그냥 누워버렸어”
그의 입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표정과 시선은 말을 시작하기 전과 동일했다. 대게 사람들이 얼이 빠졌다고 하는 모습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지금 그의 모습이 꼭 맞을 것이다. 그녀는 동공이 풀린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그에게 다시 미지근한 물을 한 잔 가져다주었다. 그는 마시지 않았지만, 고맙다는 표현은 했다. 그녀가 그의 앞에 앉아,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는 그에 물었다.
"이번 꿈은 언제 일어나는 거야?"
그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얼굴을 내리 깔며 답했다.
"오늘로부터 한 달 뒤, 오전 11시 32분"
"오늘은 꽤 구체적이네?"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그가 다시 담담히 말했다.
"응,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시계를 봤거든..."
이번에 그녀가 오른손을 턱에서 뺀 채, 자리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지난번처럼, 이번 꿈도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을 거야?"
"응"
그는 짧게 대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잠에 들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힘 없이 방으로 향하는 그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리고 달력을 보며 작년 이맘때쯤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태수가 예지몽을 꾸기 시작한 시점은 딱 1년 전쯤이었다. 주말에 달콤한 낮잠을 청하던 그가 갑작스레 다리가 무너 저 사람들이 호수에 빠지는 꿈을 꿨다. 꿈은 생생했다. 뭍에 있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부터 호수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익사한 채로 물에 등만 떠있는 사람들 끔찍한 관경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졌었다. 그는 이내 비명을 지르며, 온몸이 땀으로 뒤덮인 채로 일어났다. 그의 비명에 놀란 미진은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 말고 그에게 달려와 바라본 남편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동공은 풀려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온몸은 땀으로 뒤덮어 머리마저 젖었으며, 자신의 팔로 몸을 감싸곤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그녀의 눈에는 꼭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것 같아 보여 두려운 느낌까지 받았다. 그녀는 일단 그를 진정시키고, 연유를 물었다. 한참 답이 없던 그가 입을 뗀 것은 10분 하고도 3분 정도가 더 흐른 후였다. 그의 입에서는 너무나도 잔인한 말들을 계속 내뱉었다. 그녀는 그의 입에서 역겨운 단어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미간을 지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그가 자신이 보고 겪은 비극이 다음 주에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당연히 그녀는 믿지 않았으며, 그를 달래 다시 잠을 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그가 다시 잠을 청하자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오늘의 해프닝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정말로 호수에서 다리가 무너 저 다수의 사람들이 익사했다는 뉴스를 접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 뉴스는 그가 꿈을 꾼 지 꼬박 1주일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녀는 불현듯 지난주 그의 꿈 내용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내용을 떠올린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전화기가 계속 울렸고, 손을 떨며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그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 역시, 꿈이 맞았어
그의 짧은 고백에 그녀는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틀 전에도 비행기가 추락해서 다수의 사람이 죽는 꿈을 그가 꿨기 때문이다.
태수와 미진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비행기 사고가 일어나는 시점은 고작 8시간도 채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는 얼른 비행사에 전화해서 8시간 뒤에 비행기가 추락할 것이라고 전화했고, 그녀는 자신의 SNS를 통해 자신의 남편이 예지몽을 꿨으며, 오늘 저녁에 출발하는 비행기가 폭발할 예정이니 절대 타지 말라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조롱과 비웃음뿐이었다. 그가 전화한 항공사에서는 '순찰과 정비를 강화하겠습니다'라는 기계적인 답변만 돌아왔고, 그녀의 SNS에는 온갖 욕설과 그와 그녀를 비아냥 거리는 댓글뿐이 없었다. 세상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8시간이 흐른 저녁, 그의 꿈 대로 비행기가 추락하여 탑승객 및 직원 전원이 죽었다. 비행기는 어느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후 그와 그녀는 자신들을 무시하고 조롱했던 사람들이 앞으로 그의 예지몽을 믿어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오히려, 그와 그녀가 항공사 테러리스트로 몰려 조사를 받았으며, 몇몇 언론사는 그들을 흉악 테러리스트라고 아예 못을 박아 버렸다. 세상은 그들을 비난했다. 그의 유족들은 그들에게 소송을 걸었고, 신상명세가 온 인터넷에 돌아다녀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테러리스트라는 무고한 누명에서 벗어날 때에는 8개월의 시간이 흘렀었다. 그는 일을 관뒀고, 그녀는 신경쇠약에 걸려 매일 스무 알 정도의 약을 먹으며 버텨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꿋꿋이 견뎌냈다.
이 와중에도 태수는 몇 개의 예지몽을 꿨지만, 미진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꿈을 말하면, 그녀가 다시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미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당장은 수모를 겪었지만, 더 이상 알고 있는 죽음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녀가 그에게 꿈을 꾸냐고 물으면, 그는 이제는 꾸지 않는다고 답했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가끔 그가 식은땀에 온몸이 저려져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애써 태연하게 화장실에 들르고, 물을 한 잔 마시고는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잠을 청했지만, 그녀를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다. 어느 날, 그가 또 땀에 절여진 채로 일어났을 때, 그녀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물을 마시는 그의 뒤에 서서 살포시 안아주었다. 그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히 그녀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응"
그녀가 짧게 대답하자, 그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제는 나만 알고 있을 거야"
그녀는 그의 허리춤을 세 개 잡고는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당신의 꿈을 세상에 알려야 해, 더 이상 무기력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은 보기 싫어"
"아니.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야. 그게 그들의 운명이라고, 나는 더 이상 꿈 이야기는 하지 않은 거야. 너한테 조차도...."
그는 그녀의 손을 흘리듯 뿌리치고는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다시 그를 뒤에서 안으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알아, 당분간은 네가 꾼 꿈을 사람들한테 알리자고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내게는 알려줘. 너 혼자 감당하는 꼴은 못 봐. 너도 탈출구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는 앞을 본 채로 그녀의 말에 '응'이라고 대꾸했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고, 태수는 꿈을 꾸면, 미진에게만 말했고, 그녀는 그와의 약속대로 그의 꿈을 남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는 4~5개월 동안 총 여섯 번의 꿈을 꿨다. 죽어나간 사람도 100명을 훌쩍 넘겼다. 그는 꿈을 꾸기 시작한 뒤로 뉴스를 보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꿈이 사실인지 아닌지 조차 몰랐다. 오히려 그녀가 뉴스를 보고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그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가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는 편치 않는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무언가'는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밥을 먹거나, TV를 보는 등 일상생활을 하면서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곧 삶의 일부가 됐다. '무언가'가 느껴지면, 심장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공허하고 허한 느낌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괴롭히다가 홀연히 떠나고, 또다시 오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오는 '무언가'에 대해서 그에게 솔직히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적응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다소 냉소적으로 답했다. 이미 그는 '무언가'를 그냥 받아들이고, 삶의 일부로 편입한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 그녀는 결심했다. 그를 설득해서, 사람들을 구하기로 말이다. 그리고 이내 그를 불러 얘기했다.
"우리 이제 사람들에게 알리자. 그 사건도 반년이나 지났어. 그리고 지난번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말을 장난으로 듣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이번에는 내가 꿈을 꿨다고 할게, 그럼 너는 아무 피해 없을 거잖아"
"아니,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제발, 다시 생각해 줄 수 없어?"
"8개월 전에 나는 이 저주스러운 능력을 당장이라고 버리고 싶었어.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나는 이 능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봤어. 예지몽은 내가 원해서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꿈을 꼭 남들에게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내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것이 아니니까 굳이 내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잖아? 그래서 꿈은 꾸되 별생각 없이 살아가자라고 결론을 냈어"
"태수야.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볼 수 없어? 사람들을 살릴 수 있잖아. 너의 능력은 오히려 기회잖아"
"아니야, 이 능력은 나를 고통시키기 위한 '저주'일뿐이야.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태수야..."
그녀는 그를 보며 애원하듯 말했지만, 그는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그를 설득하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도 이미 저주라고 생각하게 된 능력을 받아들인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죽어갈 예정인 사람들의 소식이나 들으며, 또 다른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