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빽빽이 심겨 있는 맹그로브숲을 바라보며, 자신은 운이 좋은 남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3박 5일의 짧은 태국 여행의 마지막 날 그간의 촉박한 일정에 심신이 지쳐가는 중에 마주한 경관이라 그런지 만면에 숨길 수 없는 만족감과 미소가 번졌다. 태국의 현지 가이드는 유창한 영어와 어눌한 한국어를 적절히 섞어가며, 숲의 맹그로브 나무에 관해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 가이드의 말을 듣기보다는 그 광경을 놓칠세라 눈으로 풍경을 담는 데에 열중했다. 그의 옆에 있는 여행객이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허파부터 올라오는 탄성과 함께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그 여행의 시선은 맹그로브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러게요.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경관입니다. 이토록 자연이 만들어준 선물을 실제로 볼 수 있다니, 현대사회에 태어나길 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는 여행객에게 대꾸하면서, 내심 정리가 잘 된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여행객이 카메라를 내리더니, 그에게 악수를 권하며 말했다.
“저는 서울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태수입니다” 상대의 뜻밖의 인사에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는 김민수입니다” 그와 태수는 동년배로 보였다.
그는 태수가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소개했으나, 얼굴이 희고, 몸집이 투실투실한 것으로 보아 다른 본업이 있으리라 추측했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물었다.
“그래서, 그렇게 큰 카메라를 가지고 오셨군요. 요즘은 모두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데 말이죠” 그의 질문에 태수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며 하소연했다.
“요즘은 저처럼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요즘 최신 휴대전화에 사진 찍는 기능이 비싼 카메라와 별반 차이가 없어서, 아주 아쉽습니다. 아까 선생님께서는 현대 문명에 태어나서 좋다고 하셨는데, 저는 아닙니다. 예전에는 사진작가라고 하면, 예술가로 바라봤는데 요즘은 그저 증명사진이나 찍어주는 사람으로 밖에 보지 않으니, 말이에요. 선생님도 제가 사진작가라고 했을 때, 그렇게 생각하셨죠?”
그는 속으로 뜨끔했다. 최대한 내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왜 선생님 직업을 예단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진작가치고는 조금 얼굴이 희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태수가 다시 웃었다. 이제 그 둘은 맹그로브숲을 바라보지 않은 채 서로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틀에 한 번씩 교외로 나가 사진을 찍었지만, 요즘은 통 그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너도나도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 시대이다 보니까, 힘들게 사진기 들고나가서 하루 종일 밥도 못 먹고, 사진을 찍어 대봐야 휴대전화 터치 몇 번과 보정으로 찍은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거의 스튜디오에 박혀서 선생님이 생각하신 대로 고등학생들 증명사진이나 찍으며 입에 풀칠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수의 말을 듣고, 따로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고개만 끄덕거렸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지만, 그 둘은 다시 맹그로브숲을 쳐다보느라 지금의 침묵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지 가이드가 설명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못내 아쉬운 마음에 휴대전화를 들어 나무들을 몇 개 찍은 뒤,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을 태운 여행 버스는 심심한 장소 몇 군데를 더 들린 다음에야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그는 가이드를 따라 짐을 부치고,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다음 적당한 곳에 앉아 목을 위아래로 흔들어대며 몰려오는 졸음과 싸우고 있었다. 그때, 태수가 다시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주 피곤하신가 봐요? 멀리서 지켜봤는데 주무시는 것 같더라고요, 하긴 이번 여행이 꽤 강행군이기는 했어요. 참, 여행사도 그렇지 적당히 데리고 굴렀어야지, 안 그래요?”
그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패키지여행 말고 호텔만 예약해서 따로 올 걸 그랬습니다. 해외여행 자체가 처음이다 보니, 뭘 몰라서 패키지여행으로 온 거였는데….”
그의 눈은 반쯤 감기고 있었다. 여행이 끝났음에 대한 여독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찾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이역만리 타지의 어느 공항에서 1시간 남짓 출발시간을 남겨두고 잘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부리나케 일어나서 허리를 좌우로 흔들며, 잠을 떨쳐냈다. 태수는 그 모습을 보더니 자신도 하겠다며 그의 옆에서 허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별안간 한국에서 온 아저씨 두 명이 공항 한가운데에서 허리를 흔들며 춤을 추자, 몇몇 여행객들은 그들을 휴대전화로 찍었고, 또 몇몇은 소리 내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자신이 지금 광대가 되었음을 알고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았다. 태수도 그를 따라 앉으며 말했다.
“꽤 재밌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잠이 확 달아나네요. 선생님도 잠이 깨셨나요?”
그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리고 조그만 소리로 답했다.
“네, 잠은 달아났는데, 조금 창피하네요. 우리 자리를 옮길까요?”
그 둘은 원래 앉아 있던 의자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완전히 잠에서 깨서 태수와 나란히 앉아 차분히 비행기를 기다렸다. 앉아 있는 중에 태수가 몇 마디 했지만, 대화는 충분히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낮에 맹그로브 숲에서 찍은 나무들을 태수에게 보여주며, 어떠냐고 물었다.
“선생님이 찍으신 거예요? 잘 찍으셨네요. 초점 조정도 잘하셨고, 빛도 적당히 받으셨고요”
태수의 칭찬에 그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제가 뭘 했겠습니까? 휴대전화가 저절로 한 거죠”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휴대전화를 누른 것 말고는 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태수는 그가 찍은 사진을 연신 칭찬하며, 이번에는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그도 태수가 그랬던 것처럼, 맹그로브숲의 풍광이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연신 칭찬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입으로는 칭찬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약간의 조롱이 일렁였다. 마지막 사진까지, 감상이 끝나자, 태수는 힘이 빠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는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선생님, 방금 제가 찍은 작품과 선생님께서 휴대전화로 찍은 작품의 차이를 별로 못 느끼셨죠?”
태수에게 정곡이 찔린 그는 얼굴이 별안간 다시 새빨개졌다. 태수는 그의 반응을 보고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킥킥거리며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제가 암만 잘 찍어도, 기술의 발전은 못 따라오는가 봅니다” 킥킥거렸던 태수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얼굴에는 실망을 넘어 절망에 가까운 표정이 지어졌다. 그가 실망하는 태수에게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예술 작품이 어떻게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 태수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혹시, 그것을 아십니까?”
그는 태수의 물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뭐가 말이죠?”
“우리가 방금 봤던 맹그로브숲은 말이죠. 인간한테는 재앙과도 같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태수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그의 의중을 알아챈 태수는 말을 이었다.
“맹그로브 나무의 뿌리는 물속 깊이, 복잡하게 박혀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봤던 곳이야 어느 정도 정비를 해놓았기 때문에 관광 명소로서가 되어 있는 것이지, 만약, 정글 한복판에 맹그로브가 빼곡히 있다면, 인간은 그곳을 몇 날을 헤집고 다니다가 나무뿌리가 만든 천연 은신처에 기거하는 각종 악어와 뱀들 따위한테 금방 잡아먹히고 만답니다. 맹그로브는 인간이 보기 좋으라고 진화한 나무가 아닙니다. 오로지 자연을 위해 진화한 나무지요. 저는 오늘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진보하는 과학 발전이 과연 인간을 위한 진보가 맞을지 말입니다. 어쩌면 적당한 발전은 인간을 더 이롭고, 풍요롭게 살게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이상의 발전은 인간들의 지적허용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과신용의 발전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점점 발전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점점 그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은지 너무 무섭습니다”
태수는 말을 마치며 그의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 그의 입장에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 없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일 뿐 따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공항 스피커에서 그가 타고 갈 비행기가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로 인해 무기한 지연됐다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