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단편소설) 길 위의 광대들(完)

by 길거리 소설가

밖으로 나가기를 즐겨하지 않지만, 오늘 같이 청명한 하늘아래 적당히 바람이 부는 날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올해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잠시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길목에 나 또한 봄과 함께 나들이를 결심을 했다. 대충 얄팍한 겉옷을 걸치고, 지갑하나만을 챙긴 채, 길 위로 나갔다. 새벽공기가 머금은 싱그러운 풀내음이 얕은 햇살에 흩어지며, 내가 가야할 길을 안내라도 하듯 이끈다. 오늘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이다. 조금은 사람들이 많은 곳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시내로 갔다. 시내에는 벌써부터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로 북적였다. 그들 틈바구니에서 홀로 이곳저곳 구경하고 있는 찰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 내 눈길을 끌었다. 구경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은 서있고, 대부분 둘러앉아있다. 나도 그들 뒤에 서서 앞사람 어깨너머로 고개를 빼꼼이 들고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전통탈을 쓴 채로 흰색 삼배옷을 입은 무리들이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요즘도 저런 공연을 하나?’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집중했다.


빨간색탈을 쓴 남자가 무어라 지껄이며, 앞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억울한탈을 놀렸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빨간탈의 농담에 폭소했다. 억울한탈을 쓴 사람은 난처한 듯 오른다리를 사정없이 떨다가 빨간탈을 피해 관객 쪽으로 달려가 관객으로 보이는 여자뒤에 숨었다. 그리고 이따금 얼굴만 내놨다 숨겼다를 반복하며, 빨간탈을 조롱했다. 빨간탈은 관객석을 한 번 훑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날을 세워 이마에 대고 억울한탈을 찾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의 동작이 하도 우스꽝 스러워 관객들은 다시 폭소했다. 이번에는 억울한탈이 반격이라도 하듯 여자관객의 등에 숨은 채로 그녀를 앞으로 밀어 빨간탈 근처까지 갔다. 얼떨결에 딸려 나온 여자관객의 얼굴은 홍당무가 된 채 시선을 아래로 깔며 난처한 듯이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억울한탈은 여인의 행동에 개의치 않고 빨간탈 앞까지 밀었다. 여인을 발견한 빨간탈은 갑자기 호통을 쳤다.

“네가 찾던 억울한탈이 아닌데? 너는 누구냐?” 불쌍하게 끌려온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만 열심히 가렸다. 그러자 빨간탈이 말했다.

“아니 지금 네 얼굴이 붉은 것을 보니 네년이 내 자리를 노리는 모양이구나?” 빨간탈의 호통은 거셌다. 그때에도 억울한탈은 여인 뒤에 숨어있었다. 하지만 빨간탈은 억울한탈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이 여인만 나무랐다. 빨간탈은 여인에게 삿대질하며 관객석으로 눈을 돌려버리며 계속 지껄였다. 그 때, 여인 뒤에 숨어있던 억울한탈이 바지춤에서 부채를 꺼내더니 관객으로 시선을 옮긴 빨간탈의 머리를 탁하고 쳤다. 빨간탈을 ‘으악’이라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겁하게 숨어있던 억울한탈이 사뭇 진지한 투로 빨간탈을 나무랐다. “네, 이놈 네 놈의 죄를 알렸다? 너는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죄 없는 사람들을 가두고, 알량한 권력을 노름에 취해 이제는 아무한테다 욕지거리하느냐? 사실 나는 너를 잡으러 온 차사니라”

그때, 억울한탈이 자신과 함께 나온 여자 관객의 손을 잡더니 관객석을 천천히 함께 돌았다. 그러자 노란탈을 쓴 세 명이 빠르게 튀어나와 각자가 자신 있는 장기를 하나씩 보였다. 첫 번째 노란탈은 입에 기름을 머금고, 손가락에 불을 붙여 빨간탈 위로 뿜어대며 그를 위협했고, 두 번째 노란탈은 그 반대에 서서 칼을 위아래로 흔들며 칼춤을 췄다. 세 번째 노란탈은 억울한탈 앞으로 가서 그의 탈을 한 꺼풀 벗겼다. 그러자 억울한탈의 본 모습인 차사탈이 드러났다. 실로 차사다운 모습이었다. 저마다 할 일을 마친 노란탈 무리는 빠르게 사라졌고, 여자 관객도 객석으로 돌아갔다. 무대에는 다시 빨간탈을 쓴 남자와 억울한탈에서 무섭게 바뀐 차사탈만이 남았다. 빨간탈은 계속 주저앉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빌었다.

“아이고 제가 차사님을 몰라뵙고, 정말 죄송합니다. 목숨만은 살려주십쇼” 빨간탈이 싹싹 빌며 목 놓아 울었다. 그의 절규에 관객들은 감정이입이라도 한 듯 더는 폭소하지 않았다. 차사탈은 그에게 말했다.

“오늘 네 놈의 행태를 직접 보고자 저 멀리 하늘에서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내려왔더니 생각보다 더 나쁜 놈이구나, 너는 내가 지옥으로 끌고 가마” 차사의 말이 끝나자 빨간탈은 이번에는 관객을 보며 울부짖었다.

“아이고, 나 죽네, 여기 나 좀 살려주실 뿐 없나요?” 관객석은 그의 부름에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그는 망연자실하며 손으로 땅을 치며 말했다.

“차사님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목숨만은 살려주십쇼” 그의 절규에 관객석에서는 약간의 동요가 있던 모양이었다. 차사탈은 하늘을 한 번 쳐다보더니, 관객들에게 말했다.

“이놈 이거 한 번만 용서해 줄까요?” 관객들은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차사탈은 다시 관객 쪽으로 다가가 건장한 남자 관객을 무대로 데려오며, 빨간탈에게 말했다.

“자, 빨간탈 네 이놈 고개를 들어라, 오늘 내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옥황상제의 아드님과 같이 왔다. 네 놈의 죄가 가볍지는 않으나, 너의 절규를 들으니, 마음이 약해져서 너에 대한 처벌은 이 옥황상제의 아드님에게 맡기겠다.” 갑자기 불려 나온 남자 관객은 아까의 여자 관객처럼 홍당무가 된 얼굴을 하고 연신 손으로 가렸다. 빨간탈은 민망해하는 관객에게 달려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애원했다.

“아이고, 옥황상제 아드님, 줄여서 옥아님 저를 좀 살려주십쇼. 이제는 나쁜 짓 안 하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빨간탈의 절규에 남자 관객이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서 있는데 차사탈이 남자 관객 쪽으로 다가가 그에게 뭔가를 듣는 제스쳐를 취하더니 이후 크게 말했다.

“옥황상제 아드님 뭐라고요? 이놈 나쁜 짓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번만 용서해 주자고요?” 실제로 그 남자 관객이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이번에는 차사탈이 관객을 향해 물었다.

“우리 옥황상제 아드님께서 빨간탈을 한 번만 용서해 주자고 하는데 어쩔까요?”

그의 울림은 하도 커서 무대와 가장 가깝게 앉은 사람은 귀를 막아야 할 정도였다. 객석에서는 한두 명이 ‘봐줍시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빨간탈을 용서하자는 여론이 형성됐다. 차사탈은 시선을 45도로 내리더니 빨간탈을 바라보곤 마뜩잖은 듯 ‘쯧쯧’만 연발하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두 손을 허리에 모아 빨간탈에게 말했다.

“네, 이놈 빨간탈아 앞서 너의 죄가 가볍지 않다만, 옥황상제 아드님도 그렇고, 백성들도 너를 용서하라고 하니 이번만 크게 마음먹고 용서해 주겠느냐?” 차사탈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빠르게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제 무대에는 처연히 앉아 있는 빨간탈과 덩그러니 서 있는 남자 관객만 남았다. 남자 관객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별안간 빨간탈이 폴짝 뛰어오르더니 뒷짐을 짓고는 거만하게 서서 남자 관객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 놈이 정말로 옥황상제의 아들이 맞느냐?” 남자 관객은 부끄러운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었다. 그때, 빨간탈이 채근하듯 물었다.

“허허, 이놈 이거 옥황상제의 아들이 아닌가 본데? 차사 놈이 실수했나 보고만, 내가 한 번 더 묻겠다. 네 놈이 정말 옥황상제의 아들이 맞느냐?” 그제야 남자 관객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맞아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빨간탈은 의심을 걷지 않고 다시 따지듯 물었다.

“오호 네가 정말 옥황상제의 아들이란 말이지? 내가 알기로는 옥황상제께서는 오른쪽 엉덩이에 점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점이 몇 개더냐?” 이번에 남자 관객은 얼굴을 더 붉히며 “세 개요”라고 답했다.

빨간탈은 비열한 웃음소리와 함께 남자 관객에게 물었다. “오호 그렇단 말이지. 필시 네가 옥황상제의 아들이면 너도 엉덩이에 점이 있을 터, 내게 보여봐라.” 남자 관객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싫어요” “어찌 싫다는 말인가? 창피해서 그러느냐?” 그러자 남자 관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간탈이 다시 비웃으며 말했다. “이놈아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다고 부끄럽다고 하느냐?” 이때, 관객들이 모두 폭소했다. 빨간탈은 관객의 함성을 한껏 즐기고는 다시 남자 관객에게 말했다. “내가 먼저 까주리?” 빨간탈이 바지를 벗기라도 하듯이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남자 관객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은 옥황상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울부짖었다. 여기서 관객들이 또 웃었다. 다시 빨간탈이 근엄하게 말했다.

“아니, 그럼 이 놈아 내 놈이 날 속였다는 거냐? 허허 어디 근본도 없는 놈이 감히 누구를 속여 드냐? 썩 꺼져라. 이놈” 남자 관객은 빨간탈의 호통에 그대로 자리로 뛰어갔다. 홀로 무대에 남은 빨간탈은 둘러있는 관객들을 천천히 돌며 말했다.

“차사도 없는 이 땅에 이제 감히 누가 내게 꾸중하겠는가? 하하하” 그의 거드름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세 명의 노란탈을 쓴 사람이 무대에 난입하더니 빨간탈을 에워쌌다. 빨간탈은 당황하며 자신을 둘러싸고 빙빙 도는 노란탈들을 이리저리 쳐다봤다. 그리고 차사탈이 다시 나타나며 말했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너는 이만 지옥으로 가야겠다” 차사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란탈을 쓴 사람이 대형을 유지한 채로 두 발짝씩 뒤로 가더니, 일제히 빨간탈이 있는 곳으로 아까처럼 불을 뿜어댔다. 빨간탈은 무서웠는지 오들오들 떨다가 차사탈에게 덜미를 잡힌 채로 퇴장했다. 이제 무대에는 노란탈을 쓴 세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은 중간에서 칼춤을 추고, 나머지 둘은 양옆에서 동그란 공 세 개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기는 저글링 공연을 선뵀다.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공연이 끝났는지 차사탈, 빨간탈, 그리고 노란탈들을 쓴 사람들이 모두 탈을 벗고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지루하고 따분할 것이라는 내 생각과 달리 흥미진진한 민속 공연에 나는 넋을 놓았다. 배우들까지 모두 자리를 뜨자, 그곳 구경꾼들은 저마다 일어났다. 나도 여운을 간직한 채로 무대를 떠나며 생각했다.


‘정말 나오길 잘했군’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단편소설) 맹그로브(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