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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파블로프의 어린이(完)

by 길거리 소설가

약속이 취소됐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나 같은 성격의 사람들은 미리 정해둔 약속이 취소된다면 그것만큼 신나고 기쁠 일이 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난다.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 곤두섰던 신경이 실시간으로 차분해지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취소 연락을 조금 이른 시간에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미 약속 장소에 기다리는 중에 전화도 아닌 문자메시지로 통보했다는 부분이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보였기에 불쾌한 감정이 일었다. 심지어 내게 보고 싶다고 끈질기게 구애했던 주제에 이런 식의 파투는 어쩐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어차피 내게는 그리 중요한 인연이 아니었기에 공연히 시간만 죽이는 만남을 피했다는 점에서는 다행스러웠지만, 별것 아닌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로 내 기분을 망쳤다. 아무튼 복잡 미묘한 심정을 꾹꾹 누르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나섰다. 오늘 약속은 오후 다섯 시쯤 만나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에 지금은 뭘 먹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불쾌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누그러트리기 위해서는 뭐라도 먹어야만 했다. 하릴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혼자 먹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았다.


십분 즘, 거리를 배회하는데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며칠 전, 가을의 길목에 접어들었음에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나는 한번 땀이 나면, 옷이 모두 젖어 버릴 정도로 많이 흘리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시원해 보이는 곳에 들어가기로 타협하곤, 지금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선술집은 문을 연 지 얼마 안 됐는지 직원들이 바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쓸고 닦고 하고 있었다. 가게가 너무 어수선해서 나는 아직 열지 않았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직원 한 명이 나를 불러 세우고는 자리에 앉으라고 안내했다. 혼자 왔기 때문에 4인석 테이블에 앉기에는 조금 눈치가 보여, 벽에 붙은 채 바 형태로 되어있는 선반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곳은 선술집에서도 가장 외진 자리였는데, 옆에 화장실이 있고, 내 등 뒤로는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이 놓여있는 곳이었다. 나는 이런 데가 좋았다. 내 쪽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선술집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선술집의 홀 쪽을 쳐다보며 가만히 앉아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자 내 시선에 나를 불러 세운 직원이 메뉴판과 기본 안주를 들고, 홀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한참 동안 갸웃하며 홀 쪽만 시선을 두고 있는 직원이 재밌다는 생각에 좀 더 기다려볼까도 생각했지만, 선술집에 퍼지는 기름진 음식 냄새에 갑작스러운 허기가 느껴져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그제야 그는 화장실 옆 구석 칸 선반 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머쓱한 듯 헤헤거리며 다가왔다. 메뉴판은 그저 그런 술집의 메뉴판이었다. 딱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지는 않아 무난하게 감자튀김과 맥주 한 잔을 시켰다. 주문한 메뉴와 맥주는 거의 바로 나왔다.


우연히 들어온 가게에서 꽤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아까의 불쾌한 감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고 이곳에 손님이 나밖에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럼에도 한 시간 뒤면은 테이블이 하나씩 채워지며 시끄럽게 떠들 손님들을 떠올리니 다시 머리가 찌근거렸다. 얼른 마시고, 내가 여기 첫 손님이자 유일한 손님인 채로 나가버려야겠다고 다짐하고선 맥주 절반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때, 조용했던 선술집에 침묵을 깨는 요란한 말소리와 개소리가 들려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목줄을 찬 개를 데리고 들어온 뚱뚱한 사내였는데, 검은색 반팔에 같은 색의 반바지 운동복을 입고 흰 양말에 노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곰보빵처럼 넘 떼 대하고 빵빵한 얼굴은 붉은 기가 감도는 것이 옆에 있는 개와 어디서 한참을 뛰고 온 듯했다. 그가 등장하자 직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인사했다. 이 선술집의 사장으로 보였다. 그 남자는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입이 거칠었다. 한참을 말하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직원에게 손님이 왔냐고 묻더니 이내 말소리를 줄이고 스태프 방이라고 쓰여있는 문으로 급히 들어갔다. 그가 데리고 온 개는 직원이 선술집의 구석에 목줄을 메었다. 개는 그 장소가 익숙한지 가쁜 숨을 헐떡이며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다시 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란한 종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나는 자연스레 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내였다. 사내는 오른손에 들린 종을 몇 차례 흔들며, 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직원을 시켜 사료를 가져오게 했다. 개는 종소리를 듣고는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예전 학교 과학 시간에나 배웠던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신기함에 넋을 놓고 봤다. 직원이 갑자기 내 등 뒤로 와서 아까 잡동사니가 쌓여있던 곳을 뒤적이더니 능숙하게 사료를 찾아 사료그릇에 담아선 쌩하니 달려갔다. 개는 자신의 밥이 언제 오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목줄에 메인 채로 폴짝폴짝 뛰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사내는 그런 개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개는 주인의 경쾌한 종소리를 들으며, 사료를 야무지게 먹었다. 어찌나 배고팠던 건지 사료 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먹는데, 아무리 주인이라도 그 사료 그릇을 건드렸다간 다 물어버릴 기세였다. 사내는 개가 밥을 먹도록, 자리를 피해 다시 스태프 방으로 들어갔다.


재미난 광경을 보니 예전에 어떤 모임에서 들었던 일화 하나가 떠올랐다. 내게 말을 해준 사람은 초등학교 선생이었는데, 당시에 공립 초등학교에서 2학년생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자기가 가르쳤던 학교의 학생들은 소위 말해 조금 못 사는 애들이 많이 있는 초등학교라 학군이 좋지 않았는데, 부모들도 자녀의 교육보다는 먹고살 걱정을 많이 하는 그런 동네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아이들의 학업능력도 다른 초등학교의 또래의 아이들보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 선생의 첫 근무는 사립초등학교에서 했었는데 그곳의 2학년생들은 이미 초등학교 6학년 생이나 배울법한 수학 공식들을 줄줄이 꿰고 있어 가르치기 수월했기에 두 번째로 옮긴 이번 공립초등학교의 아이들도 비슷한 수준이겠거니 했다가 절망적인 학습 능력에 낭패를 봤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요령이 많이 생겼다며 웃었다. 한 번은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가르쳤는데, 학생 20명 중의 18명이나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빨리 가르치고 다음 학습으로 넘어가야 했지만, 7X8을 헷갈리는 아이들에게는 무리였다. 그러다가 하나 꾀를 낸 것이 바로 ‘파블로프의 개’ 실험의 응용한 ‘노래와 율동을 겸한 구구단’이었다. 그 선생은 하루 날을 잡아 모든 책과 책상을 뒤로 물리게 시키고는 널찍한 교실에서 허리를 흔들고 노래를 하며 구구단을 가르쳤다고 한다. 하는 방법도 보여줬는데, 우선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씰룩 흔들거린 다음에 상체를 앞뒤로 흔들며, ‘1X1=1’ 따위를 리듬에 맞춰 부르게끔 하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다행히 순박한 아이들은 선생님의 열정에 부응했다. 한둘씩 구구단에 흥미를 느끼더니, 한 달 동안 해본 결과 모든 아이가 이제는 구구단을 어려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부작용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다. 자기 반 학생들이 구구단에 적응했다고 느낀 선생은 간단한 쪽지 시험을 봤는데, 선생이 문제를 부를 때마다, 아이들이 앉은 채로 허리에 손을 얹고 엉덩이를 씰룩씰룩하거나 상체를 왔다가 갔다 흔들어 댔으며 심지어 중얼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무려 그 반 모두가 말이다. 정답을 적으며 율동을 떠올렸을 아이들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얘기하던 선생도 그 대목에서는 키득키득했다. 분명 그날의 아이들을 떠올렸음에 틀림없었다. 나 역시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기에 한바탕 폭소했다. 그리고 그 선생과는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아마 선생은 어디선가 다른 아이들에게 구구단 율동을 가르치며 속으로 만족하고 있으리라 본다.


내가 재미난 추억에 빠져들었을 때, 선술집의 테이블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다시 비어 있는 감자튀김 그릇과 맥주잔을 흐뭇하게 바라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개는 카운터 뒤쪽으로 보이는 구석에 다시 얌전히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결제를 마친 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아직도 환했다. 나는 옆으로 맨 가방을 다시 고쳐 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구구단을 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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