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가을이 그리워진다. 선선한 바람 사이에 들어오는 포근한 햇살에 여름날의 열기로 지친 몸과 마음이 다시 생기를 띄게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오늘도 일기예보는 34도를 넘어선다고 하며, 벌써 몇 번이고 빗나간 비 소식을 또 전했다. 몇 달째, 집에서 나서기 전, 일기예보만 믿고 우산을 챙겨 나갔다가 펼치지도 못하고 도로 가져간 적이 예닐곱 번은 되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도 챙겼는데,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지하철에서 나만 우산을 들고 있으니, 어쩐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속으로, ‘비만 아바라. 너희는 젖고, 나는 아니니까’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키득키득할 때. 내 등 뒤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학생, 우산이 자꾸 내 종아리를 찌르는데 조심 좀 해주세요”
나는 얼른 아주머니께 사과하고, 옆으로 비스듬히 들고 있던 우산을 앞으로 가져왔다. 다음부터는 기다란 장우산이 아니라 가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삼단우산으로 가져오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니,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삼단우산이라는 게, 말이 우산이지 비가 바람과 함께 조금이라도 세차게 내리면 뒤집히기 일쑤고, 다 젖은 우산은 접기 위해서는 만질 수밖에 없는데 그때, 빗물이 내 손에 다 묻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또 가방에 넣기도 애매한데, 가방에 쉽게 젖으면 안 되는 물건이라도 있으면, 그 물이 묻은 작은 막대기를 하루 종일 들고 다녀야 한다. 반면, 장우산은 구조가 단순해서 튼튼하기에 어느 정도 비바람은 거뜬히 막아줄 수 있고, 이동 간에도 물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세워두면 금세 빠진다. 거기다가 우산을 여닫을 때, 굳이 우산의 바깥쪽을 손으로 만질 필요도 없다. 게다가 잡기 편한 손잡이는 이동 간에 불편함을 없게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안내 음성이 나왔다. 만원 전철역에서 우산을 소지한 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여간 귀찮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까처럼 나도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나는 나대로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손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긴장을 해야 하기 때문인데, 아무튼 오늘은 제발 일기예보가 맞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하철을 나섰다.
34도의 열기를 뚫고 들어온 카페는 대각선 방향으로 서 있는 에어컨이 열심히 가동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냉기에 소름이 싹 돌았다. 이래서 나는 여름이 싫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상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내가 찾는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오늘도 늦을 모양인가 보다. 오늘 만날 상대는 내 오랜 친구인데, 친구가 해외로 잠시 나갈 일이 있어서 근 2년을 못 만났다가 어제 출국했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약속을 잡은 터였다. 2년이 지났음에도 친구의 시간개념은 그대로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코끝이 찡했다. 나는 통창이 옆에 있는 밖을 볼 수 있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지고 온 우산과 가방은 옆에 두고, 뭐라도 마실 요량으로 카운터로 향했다. 지금의 나는 덥지만 추운 상태라 음료를 고르는 데 꽤 공을 들여야 했다. 따듯한 걸 시키자니 몸 안에서는 열이 나고, 그렇다고 차가운 걸 시키자니 몸 밖에서 닭살이 솟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한 게, 뜨거운 음료를 시키되 얼음을 두세 개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임기응변 격으로 떠올린 아이디어치고는 꽤 만족스러웠다. 그 만족스러움은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이어졌는데 흐뭇한 미소는 카페 통창에 희미하게 비출 정도였다. 이제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친구에게 어딘지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켜자, 친구로부터 먼저 연락이 와있었다. ‘시차 적응 때문에 늦잠 자서, 미안하다. 30분 내로 갈게’.
처음 이 친구와 사귄 계기는 중학교 때였는데, 학교에서 짝을 지어 현장답사를 하는 숙제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늘 만나는 친구와는 접점이 없어서 서로 얼굴과 이름만 아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밖에서 마주 오는 상황에서 우연이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서로 눈치만 볼 뿐 어느 하나 인사하려고 행동하지 않았다. 그런 그와 파트너가 된 이유는 제비뽑기였다. 당시 선생님은 공정하고, 공평한 학내 분위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으시던 분이셨다. 물론,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고, 상벌의 관점이 분명하신 점에서는 칭찬받아야 마땅하지만, 단순히 짝을 정하는 문제에서 심지어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는 그룹까지 모두 제비뽑기로 결정했다. 대부분 아이는 그 선생님의 이름인 박만수를 따서 별명인 제비 만수로 불렀다. 나와 친구도 중학교 3학년 때, 제비 만수 선생님 반이었는데, 중간고사가 끝날 때쯤 현장학습 과제를 줬다. 당연하게도 선생님은 자연스레 제비뽑기로 짝을 결정했고, 나와 친구가 같은 한 조로 묶인 것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친구는 나와 짝이 되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내가 인상이 좋지 못한 편이라 친구는 나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똑같이 응수했다. 친구가 나와의 약속에서 늦기 시작한 역사는 현장학습 날부터였다. 경복궁을 탐방하고 보고서를 쓰는 간단한 숙제임에도 성적에 욕심이 많았던 나는 열의가 대단했다. 하지만 친구는 아니었나 보다. 분명 10시에 경복궁 앞에서 만나기로 했으면서 10시 50분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고, 경복궁을 탐방하는 내내 미적거리는 모습에 나는 분노했다. 결국, 이런 느림보와 짝의 인연을 만들어 준 제비 선생을 원망했다. 분노를 꾹꾹 누르며 끝난 탐방은 애초 내가 예상했을 때보다 두 시간이나 더 걸려,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친구가 힘들다며, 호수 옆에 앉았다.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친구 옆에 앉았다. 친구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와, 오늘 하늘 정말 파랗다. 여름이 오려나 봐”
당연한 소리를 하길래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친구는 시선을 내려, 벤치 옆에 펴있는 작은 꽃들로 시선을 옮기더니 말했다.
“이거 봐, 꽃이 폈어. 너무 이쁘지 않니? 그래서 주위에 좋은 향기가 번졌구나”
친구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꽃을 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길래 무시했다. 그때, 친구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는 배 안고파? 우리 밥 먹으러 가지 않을래? 아까 늦어서 미안해 밥은 내가 살게. 사실 오늘 알맞게 나왔는데 길고양이 하나가 길가에 풀썩 쓰러져있는 거야. 그 작고, 소중한 친구가 너무 걱정돼서 코에다가 손을 대보니 다행히 숨은 붙어있더라고, 그래서 배고파서 쓰러졌나 싶어서 근처 편의점에서 고양이 캔을 사다가 먹였지. 그랬더니 어떻게 됐는지 아니?”
나는 조금 궁금해져 바로 물었다.
“어떻게 됐는데?”
“기운을 펄펄 차리면서 일어나는 거 있지?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 아이와 잠시 놀아주다가 늦었어. 너무 미안해”
친구가 얼굴을 붉히며, 미안함에 고개를 떨구길래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친구에게 말했다.
“고양이가 다시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네, 나도 고양이 좋아해. 그나저나 배고프다며, 근처에 돈가스 맛있는데 알아 그리로 가자”
그날 이후 우리는 둘도 없는 단짝이 됐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공통점도 있었겠지만, 친구의 꾸밈없는 마음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하는 수 없이 다른 학교로 가야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는 사이였다. 물론, 친구는 만날 때마다 늦었고, 만날 때마다 솔직했다. 3년을 만나고 나서야 친구가 사물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같은 사물을 봐도 어쩐지 다르게 해석하고, 공감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친구는 시를 전공하기에 이르렀다. 재밌는 점은 대학 면접장에서도 늦었는데 친구 특유의 순수함을 높이 산 면접장의 교수들이 친구를 합격시켰다는 데 있었다.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면접조차도 늦는 친구를 보고 있으니, 나는 더 이상 내 약속에 늦은 친구에게 뭐라고 타박하지 않게 됐다.
친구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커피는 나왔다. 내가 주문한 대로 얼음 두 조각이 뜨거운 커피에 떠 있었다. 기대감에 한 모금 마시니 내가 원하던 그 온도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시니, 맑고 화창했던 하늘이 갑자기 어둑해졌다. 그리고 몇 번의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소나기가 내렸다. 통창에는 금세 빗물이 알알이 박혔다. 나는 혹시나 우산이 없을 친구를 걱정했다. 그렇게 밖을 바라보는 데 아니나 다를까, 지하철역에서 우산 없이 뛰어오는 친구를 바라봤다. 나는 바로 우산을 챙겨 카페를 나가 친구에게 갔다. 친구는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무작정 뛰고 있었다. 나도 재빨리 친구 곁으로 뛰어가서, 달려오는 친구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갑작스레 비가 멎자, 친구는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리고, 나를 올려다봤다.
“태수?”
친구의 안경에 맺힌 빗물 때문이었을까? 나를 바로 알아보지 못한 채, 내 이름만 물었다. 답답해할 친구를 위해 나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오랜만이네, 더 이뻐졌다? 보고 싶었어. 미영아”
우산은 겨우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로 작아서 그랬는지 그녀의 숨결과 심장 소리를 내게 전해졌다. 그녀도 이제야 안심했는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오늘 아무도 우산 챙기는 사람 없던데 역시 너는 다르구나”
그녀의 말에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우산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