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나서자 따듯한 봄 바람이 내 코끝을 건드린다. 향긋한 꽃바람에 잠시 취해 눈을 감고 그 향을 음미했다. 눈을 감으니 주변의 소리가 내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자동차 클락션 소리, 신호등 소리 그리고 바람소리까지 조화롭지않은 그 소리들이 앙상블을 이루고 그 찰라의 순간들이 내 앞에서 멈춘 듯하다.
이내, 전화벨이 울린다.
"어디세요?"
수화기 넘어 여자는, 내게 다급한 듯이 묻는다.
"지금 출발합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빨리 와주세요."
그녀가 또 재촉한다.
전화를 끊고, 나는 택시를 불렀다.
"기사님, ㅇㅇ병원 가주세요"
기사님은 내 말에 대꾸없이 출발했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매일 같이 그림을 바꿔다는 액자와 같다. 침대에 누워 밖을 바라 볼 때에는 푸른 고목하나가 늘 흔들리고, 그 고목은 계절에 따라 색이 변하며, 내 시간들이 흘러감을 깨달게 해준다. 하지만 차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또 얘기가 달라진다. 바삐 움직이는 도시 사람들의 시간처럼, 차창 밖 풍경은 매 초마다 변한다. 느림 속에 사는 내게도 차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쏜살같이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저렇듯 나의 시간들은 붙잡을 수 없다. 빠르던 늦던 그 모든 것이 나의 순간순간을 완성하는 소중한 조각과도 같으니 말이다. 재밌는 생각을 하다 보니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병실이다. 처음에는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싫었다. 정말 내가 아픈 사람이 되는 냄새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것 마저 나의 조각이라고 생각을 고쳐먹으니, 오랜 친구의 냄새 같이 느껴진다.
의사가 내게 다가온다.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아마 의사는 내게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을 것이다. 작년 암과 싸우던 내게 희망을 잃지 말고, 함께 잘 버텨보자고 말씀해주셨던 의사다. 그런데 저번 달에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며 길어야 반년이라고 이야기했다. 의사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딱히 의사의 잘못도 아니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눈물이 나고 화가 났다.
그렇게 며칠 병실에서 곡기를 끊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때, 의사가 다시 내게 왔다.
“냉정하게 이야기할게요. 환자분이 세상과 미련이 없음을 알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마저 죽음으로 재촉한다면 저는 의사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환자분께 실망할 것 같습니다. 작년 저와 함께 병을 이겨내자고 파이팅하던 그 모습은 어디가셨나요? 환자분에게 남은 6개월은 그저 무의미한 시간인가요?”
나는 당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음날, 나는 의사에게 며칠간의 휴가를 요청했고, 의사는 흔쾌히 허락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한 달의 시간을 보냈다.
다시 찾은 병실, 그리고 표정이 좋지 않은 의사, 충분히 예상했던 부분이다. 나는 웃으며 의사를 맞이했다.
“선생님이 그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오늘 여기까지 오면서 맡았던 봄의 향기를 몰랐을 거에요.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밝아 보이는 내게 의사도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선생님, 제가 쉬면서 이것 저것 생각을 많이했는데, 정말 궁금한게 있어요. 혹시 알려주실 수 있나요?”
“네 이야기 하세요. 제가 아는 부분이면 이야기드릴게요.”
“제가 죽어 가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요?”
의사가 순간 침묵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환자분이 어디로 가든 그 곳은 항상 봄일 거에요”
“봄 이요?”
나는 크게 웃었다.
“고마워요. 선생님, 답이 되었어요. 이제 곧 날씨가 더워지겠네요. 그래도 스산한 가을 바람은 보지 않고, 다시 향긋한 봄으로 돌아간다니 꽤 위로가 되었어요”
내 눈은 기쁘게 웃고 있고, 눈물 한방울이 흘렀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슬퍼 우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