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Oct 20. 2023

1. 영어권 한 달 살기를 결심한 이유

아싸 엄마와 인싸 아들의 뉴질랜드 스쿨링

내 아이의 영어 스펙    

 

  우리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ABC를 배웠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건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나 같이 중학생이 되어서야 처음 영어를 배운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이게 뭐가 늦은 거야 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어릴 때부터 영어 유치원에 보내서 공부가 아닌 놀이로 자연스럽게 영어를 습득하고, 초등학교에 가서는 여러 가지 원서를 읽으며 4대 영역을 고루 유지, 발전시킨다. 초등 시절에 수능 영어를 쌈 싸 먹을 정도로 영어를 완성(?)해 놔야 중, 고등학교에 가서 그 어렵다는 수학에 공부 시간을 올인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엄마들의 지론이다.     


  하지만 나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국어교육을 전공했던 터라 당연히 모국어가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너무 이른 문자 교육은 아동 발달에 해롭다는 신념을 갖고 발도르프 유치원에 보냈다. 일반 유치원에서도 ABC를 배우고 있을 때, 내 아이는 산에서 열매를 따고, 빵을 굽고 바느질을 하며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계속 산속에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지역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다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의 신념 따위는 지푸라기처럼 날아가 버리고 더럭 겁이 났다. 



공부 걱정 없이 행복했던 시간들



  부랴부랴 학원을 알아봤지만, 원한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유명하고 좋다는 학원들은 모두 레벨 테스트가 있었고, 그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 일찍부터 ‘레테 과외’라는 걸 받는 분위기였다. 동네의 소규모 학원을 보내려고 해도 이미 유치원 때 ABC와 파닉스 정도는 떼고 오기 때문에 나이에 맞는 반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드디어 초등학생 ‘형님’이 됐는데 유치원 동생들이랑 공부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엄마표 영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홈 스쿨링 프로그램을 결제하고, 리더스북을 사들였다.     


  먼저 엄마표 영어를 하고 있던 사촌 언니가 말했다. 엄마표로 하는 공부는 최대 초등학교 3학년까지라고. 직접 해보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1학년 때는 그냥 엄마가 좋아서 시키는 대로 하고, 칭찬받는 재미로 공부했다. 어찌저찌하여 SR 2점대까지는 도달했는데, 공부의 양이 많아지자 점점 흥미가 떨어지고, 잔소리하다 결국 애가 울면서 끝나는 날이 많아졌다. 2학년 2학기쯤 되자 아이의 자아가 많이 발달했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했다.      


“엄마, 우리나라에서는 영어 말 쓰지도 않는데 도대체 왜 배워야 돼?”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기민아, 너 꿈이 우주 과학자라고 했지?” 

“응” 

“나사가 어느 나라에 있어?” 

“미국에 있지.”

“미국이 제일 우주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거기서 배우려면 영어가 꼭 필요해.”

“힝... 그럼 나 우주 과학자 안 해!”

“그럼 뭐 할 건데?” 

“경찰 할래.”

“봐봐 기민아, 경찰 시험 과목에도 영어가 있어. 네가 앞으로 뭘 하든 거의 다 영어가 필요해.” 

“아아~~ 몰라 몰라~~!”     


  먼 미래의 꿈을 위해 영어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이에게 선뜻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뭔가 더 확실하게 피부로 느껴지는 메리트가 있어야 동기부여가 될 것 같았다.     


엄마표 영어의 흔적들







언어는 공부가 아니라 생활     


  나는 청소년기를 일본에서 보냈다. 출국을 2달 앞두고 한국에서 일본어 과외를 받았는데, 히라가나와 인사말, 자기소개 정도밖에 익히지 못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교류가 이제 막 시작되던 시기라 일본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접해보지 못했고, 안 좋은 뉴스만 귀에 들어왔다. 일본말도 거의 못 하는데 앞으로 나는 영락없이 ‘이지메’를 당하겠구나 걱정을 했다. 그러자 과외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1년 과외하는 것보다 현지에 가서 1달 동안 생활하는 게 언어가 훨씬 빨리 늘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가면 어떻게든 다 돼.”        


  선생님 말씀이 맞았다. 일본에 간 지 3개월 정도 되자 유창하진 않지만 일본어로 의사소통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1년이 지나자 일상 회화는 물론이고 학교 숙제도 문제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특별히 일본어를 공부하려고 노력한 게 아니었다. 그냥 매일 학교에 가고, 친구랑 놀고, TV를 보고,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는 사이에 일본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러다 옆 학교 남학생이랑 사귀게 되었는데 둘 다 처음 하는 연애라 다투는 일이 많았다. 아무래도 내가 외국인이라 말싸움에 불리하니, 미리 집에서 사전 찾아가며 분노의 편지를 쓰곤 했다. 고맙게도 이때 일본어 작문 실력이 확 늘었다. 외국어를 배우려면 그 나라 사람과 연애를 하거나 외국 연예인 덕질을 하는 게 최고라는데, 나는 그걸 둘 다 했으니 일본어가 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는 것이고, 그만큼 그 사람의 세계는 확장된다. 나는 지금 한국에 살면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문화를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일본어로 레시피를 검색하여 그 나라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유튜브나 인스타에 올라온 일본 예능 짤을 보며 깔깔댄다.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일본 만화책을 미리 읽을 수도 있다. 맛있는 것도, 재미있는 것도 2배로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걸 아이에게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디즈니 만화나 ‘13층 나무집’ 책이 원래는 영어로 된 작품이고, 영어를 배우면 이런 것들을 더 빨리, 많이 볼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꼭 미래의 직업을 위해 비장하게 하는 영어 ‘공부’ 말고, 그냥 영어라는 언어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사람들 틈에서 직접 아이스크림도 주문해 보고 놀이터에서 친구도 사귀어 보는 등 영어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영어권 나라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기러기 금지 조약               


  마음 같아서는 영어권 나라에 한 1년 가 있고 싶었지만, 우리 집에는 ‘기러기 금지 조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한창 조기 유학이 유행하던 때에 엄마와 아이만 외국에 나가고, 아빠는 한국에 남아 학비와 생활비를 대는 경우가 많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혼자 남은 아빠가 우울증에 걸리거나, 부부 중 한 명이 바람을 피우거나 해서 결국은 이혼하더라는 기러기 가정의 슬픈 결말을 종종 보았다. 남편은 우리는 절대 그러지 말자고 했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지지고 볶으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야 가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어린 나이에 1년의 공백은 아빠가 아저씨로 느껴지기에 충분해 보였다. 물론 공부도 중요하지만, 가족 관계를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러기 금지!!






가족들의 반응     


  그렇다면 언제, 어느 정도 가는 게 적당할까. 우선 여름 방학보다는 겨울 방학이 길어서 겨울로 정했다. 1월에는 설 명절이 있으니 외며느리 된 도리로 빠질 수가 없었다. 단기 스쿨링은 최소 4주 이상 등록해야 한다고 해서 2월 한 달 동안 다녀오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시부모님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조심스레 말씀을 드렸다. 아무래도 남편만 두고 먼 외국에 가서 한 달 동안 있다 오는 것이 어른들의 시각으로는 곱게 보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막장 시어머니 스토리를 많이 봐서 그런가 “그럼, 한 달 동안 애비 밥은 어쩔 거냐?” 이런 말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긴장이 됐다. 



상상 속의 시어머니


  하지만 어머님 아버님은 예상외로 엄청 쿨 하셨다.


“기왕 가는 거 더 일찍 가서 오래 있다 오지 그러냐.”

“아, 그러고 싶은데 설날도 있고 해서 2월에 가려고요.”

“그 뭐 명절 한 번 빠진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비행기 날짜 땡겨봐라.”     


  가서 멋진 풍경 많이 보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즐겁게 지내다 오라며 용돈까지 주셨다. 남편보다도 더 응원해 주시는 어머님 아버님께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남편은 처음에 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영어 공부하고, 유학박람회에 가고 할 때까지 별말이 없다가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니까 그제야 놀란 눈으로 진짜로 가냐고 물었다. 이거 봐, 나는 한다면 하는 여자라고. 물론 나중에는 남편도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마워. 여보, 사랑해. 아무튼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여행 3주, 스쿨링 4주 총 7주간의 해외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