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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20. 2023

4. 뉴질랜드 경찰에게 잡히다

아싸 엄마와 인싸 아들의 뉴질랜드 스쿨링

  뉴질랜드는 영국, 일본처럼 우핸들 국가이다. 좌핸들에 익숙한 한국 사람이 갑자기 뉴질랜드에서 운전하기는 쉽지 않다. 깜박이를 넣으려고 했는데 와이퍼가 쓱싹쓱싹하는 건 기본이고, 신호 체계도 조금 달라서 (좌회전/우회전 신호가 모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어서 눈치껏 가야 한다. 그리고 화살표가 적색/녹색으로 표시되어 헷갈린다.)  맨 앞줄에라도 서게 되면 이게 가도 되는 건지 아닌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뒤차가 가라고 빵빵 해줄 때까지 식은땀만 흘리고 서 있는데, 간혹 인내심 많은 매너 운전자가 계속 기다려주는 바람에 더 민망해지기도 했다. 주행 중 운전석에 사람은 안 보이고 웬 개가 앉아있어서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나는 유학원에서 제공하는 운전 연수를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자력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우핸들 운전 영상을 열심히 보기도 하고, 택시 버스를 탈 때마다 도로를 유심히 보며 마음속으로 운전 시뮬레이션을 했다. 그래봐야 격투기를 글로 배운 격이라 아무 소용없었다. 직접 뚜드려 맞으면서 익히는 수밖에.      



복잡한 신호등과 운전하는 개



  퀸스타운 여행을 마치고 북섬으로 올라와 렌터카를 빌렸다. 낡고 자그마한 일본 소형차였다. “좋아! 이론은 끝났다. 이제부턴 실전이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시동을 켰다. 조심스레 액셀을 밟는데 차가 갑자기 쑥!! 나갔다. 차의 외양은 햄스터인데 반응속도는 치타 같았다. 익숙지 않은 우핸들에 잔뜩 긴장이 돼서 더 빠르게 느껴졌다. 렌터카 사무실을 벗어나 뽈뽈뽈 도로에 진입했다. 이렇게 된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엔 없었다. 남편도 없고 믿을 건 오로지 나와 구글맵뿐이다. 출국 전에 미리 구글맵 네비게이션 조작법을 익혀 보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선 서비스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과연 네비게이션이 한국어로 안내를 해주느냐’였다. 가뜩이나 긴장되는데 운전하면서 영어 듣기 평가 시험까지 볼 순 없지 않은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경로 탐색을 눌렀다. 네비 총각의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싸!! 한국어다!!” 마음속으로 구글 창업자와 한국의 인지도를 높여준 BTS에게 무한 감사를 표하며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고마워요, 구글 네비 총각. 신세 많이 졌어요

  처음엔 어디를 1차로로 봐야 하는지 몰라서 양보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추월하려는 차가 뒤에서 빵빵대긴 했지만, 눈칫밥을 먹으면서 곧 알아차렸다. 표지판에 쓰인 규정 속도는 마치 가게 문에 붙은 ‘당기시오’처럼 아무도 안 지키는 것 같았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시내 주행할 때는 법을 칼같이 지키고 매너있게 운전하는데, 고속도로만 나오면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분출하는 건지 다들 미친 속도로 달렸다. 깨끗하고 풍부한 자연환경인 만큼 로드킬 당한 동물도 많았다. 다람쥐, 토끼는 그렇다 쳐도 새는 날 수 있으면서 왜 납작해져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은숙 작가의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를 보면 가정폭력을 당하던 여성이 처음으로 남편에게 대항하며 앞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아주 먼 나라의 도로를 끝도 없이 달릴 거야.’라는 대사가 당시에는 어떤 느낌인지 와닿지 않았는데, 내가 직접 아주 먼 나라의 끝도 없는 도로를 달려보니 정말 이만한 자유가 없었다. 윈도우 바탕화면같이 비현실적인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긴긴 도로에는 오직 내 차밖에 없었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빨리 가라며 빵빵대는 뒤차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속도대로 달리며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보고, 신나게 노래도 불렀다.


  한국에서의 나는 스스로 정해놓은 틀에 박혀서 좋은 아내이자 며느리, 딸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엄마 역할이었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학원을 적게 다니는 편인데도 아이는 늘 시간에 쫓겼다. 학교 다녀와서 잠깐 놀고 학원 가고 숙제하고 밥 먹으면 금방 잘 시간이었다. 나는 늘 아이에게 뭔가 지시를 하고 있었고, 아이는 뭐든 한 번에 하는 법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양치나 목욕도 두 번 세 번 잔소리를 해야 겨우 하니,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데 에너지를 다 써서 마음을 나눌 여유 따윈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의 성과가 곧 나의 성과라고 여겼기 때문에 공부를 ‘시켜야’한다는 압박감이 늘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먼 나라의 끝도 없는 도로를 달리는 순간만큼은 아이가 내가 업고 가야 할 무거운 바위가 아닌, 나란히 앉아 여행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로 느껴졌다. 책임과 의무에서 훌훌 벗어나 개인으로 돌아가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함께 깔깔댈 수 있었다. 가끔 캄캄한 밤하늘의 수없이 많은 별들을 바라보면 ‘아, 나는 정말 작디작은 우주먼지로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럼 내가 여태까지 붙들고 있었던 고통과 고민들도 아주 사소한 티끌처럼 느껴진다. 그때의 해방감과 자유가 바로 끝없는 초원을 달릴 때 느꼈던 것과 매우 비슷했다.     


옆에 애가 없었으면 전재준처럼 욕도 했을텐데 


  우리는 그동안 맘 편히 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이 열심히 돌아다녔고, 하고 싶은 것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하기로 했다. 로토루아에 루지를 타러 가서도 원래 계획은 두 번만 타고 내려오려던 거였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밤늦게까지 원 없이 탔다. ‘안 돼’, ‘이제 그만’을 입에 달고 살던 엄마가 동심으로 돌아가 지칠 때까지 함께 놀았으니 우리는 둘 다 초흥분 상태였다. 마치 술 먹은 사람들처럼 두 뺨이 발그레해진 상태로 얼마나 재미있었는지를 떠들어댔다.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고 내려와 운전대를 잡으니 자신감이 뿜뿜했다. ‘내가 애를 태우고 뉴질랜드의 드넓은 초원을 가로질러 여기까지 오다니 역시 난 베스트 드라이버다. 키야~!’ 속으로 셀프 칭찬을 하며 액셀을 밟았다. 늦은 밤이니 다니는 차도 별로 없고, 신호등의 요정이라도 나타난 건지 가는 길마다 초록 불이었다. 신이 나서 쿵짝쿵짝 노래를 들으며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왜애애애앵!” 하고 요란한 소리가 우리를 압도했다. 사이드미러를 슬쩍 보니 웬 경찰차가 번쩍번쩍 빛을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지나가는 거겠지 생각했는데, 경찰이 마이크에 대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우리 차 번호를 말하며 길가에 세우라고 했다. ‘뭐지? 뭐지? 나 뭐 잘못했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당황하니 차를 어디에 세워야 할지도 몰라서 뚝딱거렸다.      


  덜덜 떨며 차에서 내리는데 순간 미드 범죄물에서 본 게 떠올랐다. 그래서 경찰에게 말끝마다 ‘Sir’을 붙여가며 최대한 선량한 얼굴로 무슨 일이시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알고 보니 내가 오밤중에 안개등만 켜고 달리고 있었고, 사고 위험이 있어서 라이트를 제대로 켜라고 알려주려고 경찰이 따라왔던 거였다. 나는 내가 신호 위반이나 속도 위반이라도 한 줄 알고 쫄아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라이트 문제라는 걸 알고도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이 나라에서는 라이트 안 켠 것도 불법일 수 있으니까. 불법을 저지르면 추방당할 수도 있고, 나중에 입국 금지당할 수도 있는데 어떡하지? 내 머릿속의 걱정 세포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자꾸만 만들어 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우선 뉴질랜드는 아이에게 친절한 나라이니 조금이라도 상황을 참작해주지 않을까 싶어 아이가 앉은 조수석 창문을 한껏 내렸다.         


  순간 언어적 소통보다 비언어적 소통의 유리함이 떠올랐다. 한껏 어리숙한 외국인 티를 내며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을 했다. 그리고 요구하지도 않은 여권, 한국 면허증, 국제 운전면허증을 주섬주섬 들이밀었다. 그러자 경찰이 웃으면서 그런 건 됐고, 혹시 모르니 음주 측정이나 한번 해보자고 말했다. 기계에 대고 바람 부는 방식이 아니라 숫자를 5에서부터 거꾸로 세라고 했다. “Five...Four......” 이 상황에서 영어로 말하자니 그 쉬운 것도 긴장이 됐다. 무사히 음주 측정을 마치고 경찰이 안전 운전하라며 웃는 얼굴로 보내줬다. 여태까지 한국 경찰한테도 잡혀 본 적이 없는데, 뉴질랜드 경찰한테 잡히다니. 이거 완전 인스타 각이다 싶었는데, 이 상황에 사진 찍었다가는 괘씸죄로 잡혀갈 것 같아 자제했다. 대신 공항에서 만난 친절한 경찰 아저씨의 사진으로 마무리 하겠다.             


나 잡은 경찰아저씨는 얼굴도 생각 안남 너무 쫄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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