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 나라를 고르기 위해 구글맵을 켰다. 우선 미국과 캐나다가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비행시간이 무척 길어 보였다. 어마어마하게 큰 땅덩어리에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가슴도 엉덩이도 어마어마한 섹시 래퍼 언니 같다고 할까? 크기가 큰 만큼 선택지도 많아서 숙소도 학교도 고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서 아이와 함께 7주의 시간을 보내자니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때 마침 ‘괌’이 떠올랐다. 미국령이니 영어를 사용하고, 비행시간도 짧고, 가족 여행으로 몇 번 가본 경험이 있으니 첫 한 달 살기 나라로 가장 만만해 보였다. ‘그래! 괌으로 결정이다!’
미국 본토는 왠지 이런 느낌;;
신은 나에게 충동성과 추진력을 주셨으나, 꼼꼼함은 주지 않으셨다. 나는 대충 괌 한 달 살기, 스쿨링 등의 글을 검색해 보다가 숙소 확보가 가장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괌은 개인이 숙소를 구하기에 무척 불리했다. 부동산에서는 1년 이상 장기 체류하는 사람을 선호했고, 에어비앤비의 경우 괌에서는 라이센스가 있는 사람만 호스트를 할 수 있는데, 홈페이지의 정보만으로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불법 렌트인 게 밝혀져 중간에 쫓겨나는 일도 있다고 들었다. 한 달 살기 짐을 바리바리 들고 애랑 길거리에 나 앉는 대재앙을 겪을 수는 없었다. 결국 유학원을 통해 숙소를 소개받는 길을 택했다.
괜찮아 보이는 유학원 카페에 가입해서 상담 신청을 했는데, 컨설팅 비용이 무려 3만 원도 아니고 30만 원이었다. 줌으로 몇 분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너무 비싸다는 생각을 했지만, 계약을 하면 돌려받는 돈이라고 하니 그냥 덜컥 진행을 해버렸다. 괌에 살고 있는 한국인 직원이 간단한 프로그램 안내와 몇 군데 숙소 사진을 보여주었다. 신축을 제외한 대부분의 숙소 상태가 매우 처참했다. 가격이라도 착하면 이해를 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따뜻한 섬나라의 거대 곤충들이 옹기종기 모여 다과회라도 열 것 같은 작고 낡은 원룸 하나에 사오백이 우습게 깨질 지경이었다. 하긴 괌에 여행 갔을 때 5성급 호텔조차 낙후되어 여기저기 고장 난 것이 많았으니 일반 숙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숙소 상태에 1차 충격을 받고, 스쿨링 내용에 2차 충격을 받았다. 나는 영어 캠프가 아니라 스쿨링이니 당연히 현지 아이들과 모두 같은 수업을 듣고 활동을 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유학생들은 따로 모여 ESL 수업을 듣고, 체육이나 음악 같은 예체능 수업만 현지 아이들이랑 한다고 했다. 아뿔싸. 괌이 만만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매년 겨울방학만 되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한국 학생들이 오기 때문에 빨리 등록하는 사람이 임자라면서 유학원은 등록을 재촉했다. 갑자기 현타가 쎄게 왔다. 기껏 돈 들여 영어권 나라에 왔는데 한국 애들끼리 모아놓고 영어 수업하는 거면 그냥 학원 다니는 거랑 뭐가 다르지? 해외 영어 캠프 갔다가 한국 친구만 잔뜩 사귀고 왔다는 얘기가 남 일이 아니었다. 나의 동공 지진을 눈치챈 직원이 잘 생각해 보시고 연락을 달라면서 줌 회의를 종료했다. 이렇게 나의 30만 원은 라쿤이 물에 씻어버린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눈탱이 맞은 나
심란한 마음으로 괌에 대해 계속 검색해 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정보가 있었다. 바로 내가 가려고 하는 일정이 미군들이 괌에서 훈련하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숙소와 렌터카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달러 환율은 자꾸만 치솟았다. 컨설팅 비용으로 들인 거금 30만 원이 아까워서 속이 무척 쓰렸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성급하게 뛰어든 것에 대한 인생 수업료라고 생각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뉴질랜드, 너로 정했다!!
인터넷으로 이 나라 저 나라의 한 달 살기, 스쿨링 관련 글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거의 유학원의 광고 글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블로그를 보게 되었는데 딱 나에게 필요한 내용이었다. 블로그 주인은 벌써 몇 차례 해외 스쿨링 경험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만족한 곳이 뉴질랜드라고 했다. 우선 한 반에 같은 국적의 유학생이 몰리지 않도록 법적으로 제한을 두고 있다고 하니 괌처럼 한국 아이들끼리만 모여 수업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클랜드와 같은 도시보다는 조금 외곽에 있는 한적한 곳으로 가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아무래도 시골(?)로 갈수록 유학생 수가 적으니 학교 측에서도 더 신경 써주고, 아이들도 순박해서 호기심을 갖고 다가온다고 했다. 게다가 외곽으로 갈수록 숙소 렌트비가 저렴해지니 너무나도 좋은 꿀팁이었다. ‘그래! 뉴질랜드, 너로 정했다!’
생각할수록 뉴질랜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볼수록 매력 있는 건강한 시골 소녀 같은 느낌? 우리나라가 겨울일 때 그곳은 여름이니 날씨 따뜻해서 좋고, 한국에서 미세먼지 가득한 회색 하늘만 보다가 청정 뉴질랜드의 파란 하늘 아래에서 숨 쉴 생각을 하니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 서구사회에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증가하는 추세였는데, 뉴질랜드는 인종차별이 거의 없다고 들었다. 미국 같은 나라에 비하면 총기사고도 없고 치안도 좋은 편이라니 안심이 됐다. 물가도 외식만 안 한다면 우리나라와 비슷하거나 약간 비싼 정도였다. 내 마음은 이미 뉴질랜드에 가 있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덜컥 비행기표를 끊고, 유학원과 계약을 했겠지만, 나는 이미 30만 원어치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에 유학원에는 카톡으로 가벼운 상담만 하고 몇 달 뒤에 열리는 유학박람회에 가서 자세한 내용을 들어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뉴질랜드는 이런 느낌? ㅎㅎ
코엑스 전시장에 가보니 뉴질랜드 타우랑가 지역의 초중고 교장 선생님들과 유학 담당 선생님들이 학교 홍보를 위해 와 있었다. 유학원에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각 학교마다 부스를 설치하여 개별 상담을 하는 형식이었다. 사실 유학원이나 학교에서 선호하는 것은 1년 이상의 장기 유학생이다. 4주짜리 단기 유학생은 별로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참 설명을 듣다가 단기 유학을 희망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된장찌개에 고기인 줄 알고 먹었는데 된장 덩어리 씹은 사람처럼 시큰둥한 반응의 학교가 꽤 있었다. 그러다 어느 똘망똘망한 여학생이 홍보하고 있는 곳에서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뉴질랜드 학교에서 3년 동안 유학을 하고 이번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에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가 깔끔한 교복을 입고 이 학교가 얼마나 좋았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영어를 거의 못 하는 상태로 갔는데도 친구들이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학교에 커다란 놀이터가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다른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보다 직접 경험한 아이의 이야기가 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다행히 단기 유학생도 환영해 주는 분위기였다. 이 학교보다 더 으리으리한 시설의 학교도 많았지만, 똘망한 여학생의 진심과 장기/단기 차별 없이 반겨주는 마음이 고맙게 느껴져 이 학교로 결정했다.
내가 선택한 TE AKAU KI PAPAMOA SCHOOL
유학원 등록에도 여러 가지 옵션이 있다. 유학 정착 서비스라고 해서 숙소와 렌터카 연결은 물론이고 공항 픽업, 운전 연수, 장보기, 학교 오리엔테이션 동행, 각종 사고나 응급상황 시 대처 등 유학원에서 전체적인 케어를 해주는 것이 있다. 물론 비용이 발생하긴 하지만, 장기체류이거나 다자녀 혹은 영어로 의사소통 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면 좋은 선택일 것이다. 나 역시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학교 등록 대행만 신청했다. 숙소는 구글맵으로 학교 주변을 검색해 보고 에어비앤비로 구했다. 렌터카는 파파고를 돌려가며 인터넷으로 예약했다. 비행기 티켓까지 끊었으니 큼지막한 것은 다 정한 셈이었다. 내가 질러 놓고도 실감이 안 났다. 괌에 가려던 게 얼떨결에 뉴질랜드가 되었다. 한 번도 안 가본 곳이지만, 호주까지는 가봤으니 뭐 비슷하겠지 하고 별 걱정을 안 했다. 대충 미래의 걱정은 미래의 나에게 맡겨버리는 얼렁뚱땅한 성격이 이럴 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일단 가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출발일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