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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안 씻는 어르신을 바꾼 마법의 단어

by young

저희 주간보호센터에서는 어르신들께 일주일에 한 번씩 무료로 목욕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대다수 어르신들은 목욕날을 기다리고, 씻고 나서 시원하다며 만족합니다.


하지만 목욕 서비스를 거부하는 어르신들도 꽤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다시 애가 된다는 말처럼 일단 씻는다는 말에 거부감을 보이는 분들도 있고

본인 집이 아닌 센터의 샤워실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씻는 것을 싫어하는 분들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본인의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을 수치스러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센터에 유달리 목욕을 거부하는 한 남자 어르신이 계셨습니다.

인지 능력은 또렷하고 말씀도 잘하지만 몸이 불편하셔서 집에서 혼자 목욕을 하실 수가 없어

목욕 서비스를 몇번이나 말씀 드렸지만 매번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극구 거절하셨습니다.


슬쩍 목욕 이야기를 꺼내려고만 하면 귀신 같이 알고 손을 내저으며
“오늘은 몸이 아파서 못해요.”
하고 말끝을 자르셨죠.


그렇다고 억지로 씻길 수는 없었습니다.
자칫 실랑이 과정에서 어르신이 다치시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오히려 그런 경험이 더 큰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대로 된 목욕을 안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어르신 몸에서 조금씩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걱정되는 마음에 가족분들에게 집에서라도 정기적으로 목욕을 시켜드리기를 요청드렸지만 가족분들도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저희가 다 딸이다보니까.. 아버지가 한사코 거절하세요..본인이 씻을 수 있다고 매번 혼자 들어는 가시는데.. 몸이 불편하셔서 제대로 씻는건 힘들죠..그렇다고 저희가 억지로 씻길수도 없고.."


어느 순간 센터 내에서도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직설적인 어르신들의 특성상 코를 막고 자리를 옮기는 어르신들도 있었고 대놓고 면박을 주는 어르신들도 있었습니다.


"이 양반아 냄새 나는데 좀 씻고 와라!"


그렇게 어르신은 센터 내에서 점점 고립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향수도 뿌려보고, 옷을 자주 갈아입혀보기도 하며 어떻게든 도와드렸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르신께서 조용히 제게 다가오셔서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원장님... 저 오늘 목욕 좀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면도도 좀 해주세요.”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 싶을 정도였죠.

저는 얼른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불러 부탁드렸고 어르신께서는 오랜만에 전신을 깨끗하게 씻으셨습니다.
면도도 깔끔히 하셨구요.


그리고 그날은 마침 자원봉사자 선생님이 이발 봉사를 오신 날이었습니다.

저희는 얼씨구나 싶어 머리까지 멋지게 손질해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루 만에 어르신은 완전히 ‘멋쟁이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센터 안에 계시던 다른 어르신들께서도 깜짝 놀라시며 말씀하셨죠.


“어머, 누구세요?”

“머리를 자르니 총각인줄 알았네~”


어르신은 부끄러운 듯 아무 말없이 웃기만 하셨습니다.

오랜만에 다른 어르신들과 대화도 나누며 저희의 걱정을 날려주었습니다.


기쁜 마음에 저는 보호자께 바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버님이 오늘 목욕도 스스로 원하시고 면도에 이발까지 다 하셨어요!”


보호자분이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말에 손주 결혼식이 있어서요. 아버님께 냄새가 심하면 결혼식에 못 간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아마도..그 말에 결심하신게 아닐까요? 손주 결혼식엔 꼭 가시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습니다.
어르신은 그 날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신 거였습니다.


결혼식 날, 어르신은 가족들과 함께 말끔한 정장을 입고 센터를 나서셨습니다.
정말 멋졌습니다. 이야기 속 표현이 아니라, 정말 ‘영화 주인공처럼’ 보였습니다.


그날 이후 어르신은 거짓말처럼 다시 예전의 ‘목욕 거부 어르신’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다른 어르신들의 면박에 머리를 긁으면서도 요지부동입니다.


그래도 저희는 압니다. 기회만 오면, 다시 멋쟁이 할아버지가 돌아올 수 있다는 걸요.


돌봄은 결국 기다리는 일이고,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함께 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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