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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사 Dec 24. 2019

조직을 '죽이는' 건배사

이태원의 이른 새벽은 우리를 더욱 솔직하게 한다. 어둑한 선술집에서 어묵탕에 소주를 몇 병째 기울이고 있었다. 분위기에 맞지 않게 한 테이블에서 거창한 건배사가 들린다. 선술집이 갑자기 떠나갈 듯 시끄러워졌다.


"우리도 수다 떨기 시작하면 접시 깰 수 있는 멤버인데" 누군가 나지막이 한 마디 내뱉자 A가 입을 연다. 


"너 '죽어라'라는 건배사 해봤냐?"


"뭐야 삼행시인가? 아재들 좋아하는 거?"


"아니. 진짜 그냥 '죽어라'라고."



본부 전체 회식 자리였다. 늘 그렇듯 테이블 막내는 고기를 굽고 고참은 폭탄주를 말아 순서대로 돌린다.


본부장부터 차례대로 건배사를 시작한다. 연차가 낮아지는 순서대로 내려가는 방식이다.


"올 한 해 우리 본부 여러분 가열차게 달려왔습니다. 내년 상반기에는 올해 달성치보다 딱 2%만 더 잘해봅시다! 제가 2프로 하면 부족하다! 외쳐주십시오! 2프로!"

"부족하다!"


가당치도 않은 건배사를 하고 본부 50여 명의 직원이 하나같이 원샷을 때린다. 밑 잔 깔기란 없다. 눈치 없이 마시다 마는 직원이 있으면 바로 과장급들의 견제가 들어온다.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야 뭐하냐?"


본부장을 필두로 부본부장, 각 부서 부서장들이 줄줄이 건배사를 이어간다. 그렇게 약 8잔 정도 폭탄 돌리기를 했다. 30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이제는 테이블 별로 각개전투다.


테이블에 앉은 최고참이 자기 술을 말기 시작한다. 자기 술만 마는 줄 알았더니 혼자 마시고는 다시 만다. 막내 A에게 건넨다.


"야 형이랑 한잔 해야지. 마시고 다시 한 잔 말아줘라."


A는 열정 넘치는 5년 차 직원이었다. 내로라하는 명문대 경영학과를 나왔고 어린 나이에 입사해 패기, 능력, 인성 모두 검증받은 똑똑한 청년이었다. 이미 2년 차부터 같은 업계에서는 그를 알아주기 시작했고 다른 회사로부터 이직 제안도 수차례 받았다. 그래도 그는 자기가 몸담은 회사에 충성하며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했다. 일종의 첫사랑 같은 거였다. 첫 직장이라 갖게 되는 열정 말이다.


하늘 같은 선배가 형이라며 한 잔 말아달라는데. 이게 뭐 어려운 일인가. A는 냉큼 잔을 받아 마시고는 머리 위로 털었다. 그러고는 다시 황금 비율로 소맥을 말아 건넨다.


A라고 처음부터 이런 술 문화가 익숙했던 건 아니다. 처음에 잔 돌리기를 할 때 A형 간염 항체가 없다고 해볼까도 생각했다. 그럴 조직 분위기가 아녔다. 한 번 두 번 술자리에 참석하면서 남의 잔으로 마시는 술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게 정녕 즐기는 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자리마다 동기 녀석 B가 지원군이 되어 주고는 했는데 이제는 독고다이다. B가 지난달 외국계 회사의 오퍼를 받고 연봉을 1.5배 정도로 불려 이직했기 때문이다. B도 A와 함께 조직에 뼈를 묻을 각오로 열심히 했던 친구인데, 자본 앞에 이길 자 없더라. A도 내심 '나 같아도 1.5 배면 간다'라고 생각했다. 그러기가 쉽지 않기에, 그리고 지금 회사 연봉이 그렇게 불만족스럽지는 않기에 다니고 있다만 말이다.


사실 B가 그렇게 연봉을 불릴 수 있던 이유는 남몰래 야간으로 대학원을 다닌 영향도 있었다. 대학원으로 석사 학위가 추가되면서 경력을 2년 더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도 이런 술자리만 그만 나가도 대학원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한 차장이 술병을 잡고 숟가락으로 쳐댄다. 주목하라고.


'아. 아. 제가 취한 김에 마이크 좀 잡겠습니다. 어째 박수 소리가 안 들리네요?'


시작됐다. 그는 이 본부의 최상위 관종. 천박하게 말하자면 부장부터 임원들 똥꼬 빠는 게 주특기다. 빨고 있을 시간에 자기 업무 한번 더 들여다본다면 이 정도로 표현하진 않았을 것이다.


"먼저 늘 우리 본부를 위해 힘써주시고, 이런 좋은 곳에서 회식 자리도 마련해주시는 존경하는 본부장님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또 각 부를 잘 이끌어주시는 부장님들, 사랑합니다."


지겨울 때도 됐는데 본부장 부장들은 좋다고 웃고 있다. 옛말에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랬는데. 참 가볍디 가벼운 존재들이다.


"지금 제 밑으로 30명 정도가 있습니다. 다 부족하고 아직도 본부장님 부장님들께서 사랑으로 이끌어줘야 하는 후배들입니다. 원래 34명이었는데 한 해 사이에 어디로 사라져 버렸네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다. 지금 B 얘기를 하려는 건가? A는 알딸딸한 정신을 부여잡는다.


"개새끼도 자기 키워준 은혜는 안다는데 이 새끼가 사람 새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회에 나오면 조직이 곧 가족인데 말이죠. 건배사 하나 올리겠습니다. 제가 '나가면'하면 '죽어라' 외쳐주십시오."


지금 인간한테 죽으라고 외치라고 한 건가? A는 완전히 술에서 깨버렸다. 자신의 도덕관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마음으로 죽여도 사람을 죽인 거라는데 말로 죽이랜다. 그것도 내 동기를. 아니 한 때 '가족이나 다름없는 우리 조직의 구성원들'을. 가족한테 죽어버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던가? 그건 대체 어떤 패륜인가.


"나가면"

"..."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A뿐이 아녔다. 다른 직원들도 '죽어라'라는 건배사는 너무하지 않았나 싶었다. 다들 애초에 그 차장의 말을 못 들은 것으로 하며 자기들끼리 술잔을 부딪쳤다. 세상모르는 신입 사원 몇 명과 이미 고주망태가 된 사람들 두세명 만이 "죽어라"라고 어물댔을 뿐이다.


차장은 민망해졌는지 잔을 원샷해버린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A 테이블로 온다. 제발 오지 말라고 마음 속으로 빌었건만 소용이 없다. B의 유일한 동기가 자기여서 그런가. A가 쌍심지를 켜고 소맥 두 잔을 만다.


"야 니 동기라서 그렇게 닥치고 있는 거냐?"


오늘 회식은 그냥 새된 거 같다. 저 인간은 이제 B 대신 나를 조질 기세다.


"요즘 새끼들은 하나같이 정신력이 부족해. 회사 나간 것도 결국 지가 못나서 나간 거 아냐? 저번에 보니까 내가 뭐 하나 시켰더니 제대로 하지도 못하더구먼. 너는 그러면 안된다."


"아 네 알겠습니다."


"알겠으면 한 잔 말아봐."


A는 또 묵묵히 잔을 만다. 오늘 마신 폭탄주가 총 몇 잔이지? 정신을 붙잡고 술을 넘기는데 눈 앞이 뿌옇게 아득해진다. 아득한 것은 그의 시야뿐만이 아니었다.


저 얘기를 듣고는 A가 죽는 건 아닐까 싶었다. 다행히 A형 간염 항체가 없다는 건 그냥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생각해낸 말이라고 한다. 그래도 30대 초반의 A의 신체 나이가 40살이라는 건 충격이었다.


과도한 회식, 잔 돌리기, 폭탄주, 파도타기 등은 군대식 조직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뭐 가끔 하다 보면 재밌을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그러다가 죽는다. A형 간염은 잘 알다시피 보균자의 침이나 분변을 통해 전달된다. 항체를 갖고 있는 사람 비율은 40대 미만일수록 적다고 한다. 그러니까, 40대 이상 A형 간염 항체 보유 부장님하고 잔 돌리기를 신입사원이 했다면 재수 없으면 신입만 간염에 걸릴 수 있단 거다. 실제로 '한 달 만에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고 한다.(https://news.joins.com/article/6487998)


간염 얘기가 괜히 길어졌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회식 문화가 얼마나 비위생적이고 후진적인지 말하고 싶어서다.


A의 직장 상사는 누군가 죽길 바라는 게 염원이었던 걸까. 그 사람의 의도가 조직 결속력을 강조하고 분위기를 살리겠다는 거라고 해도 사람에 대한 예의는 상실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A의 상사 역시 건배사 문화의 피해자일지도 모르겠다. 상급자부터 차례로 한명씩 건배사를 해야 하니 나중 가면 무슨 내용이 남겠는가. 좋은 말도 계속 듣다 보면 지겹다.


건배사란 원래 조직의 화합과 술자리 배석자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쓰이는 거다. 정상회담 자리에서도 하고 심지어 남녀 간에 작업을 걸 때도. '당신 눈동자에 건배'라며 느끼한 눈빛 쏘고 그러지 않나. 회식 등 공식적인 자리에선 참석자들이 최대한 공감할 수 있는 격려의 말이 가장 무난하다. '직장이나 가정이 잘되길 바란다' '그간 수고했다'는 의미의 건배사가 일반적이다. 


우리나라 문화가 유달리 조직, 집단 중심적이어서일까. 회식 자리는 참석자 대부분에 의무적으로 건배사를 요구한다. 회식 날만 되면 사회 초년생들은 검색 엔진을 돌려가며 참신한 건배사를 찾기 일쑤고 좀 더 창의적인 사람은 직접 삼행시를 짓기도 한다.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라든가 소화제(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 정도는 무난하다. 조금 아재스럽긴 하지만 의미는 서로를 독려하고 자리에 와줘서 고맙다는 거 아닌가. 


하지만 억지로 짜내려니 무리수를 두게 된다. 온갖 추잡스러운 건배사들도 난무한다. 한때 유행했던 건배사 중에 '성행위'가 있다.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라고 한다. '거시기'는 어떤가. '거절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기쁘게 마시자'라는 뜻이다. 이런 부류의 건배사는 대체로 발원지가 단란주점 등 유흥업소라고 하니 수긍이 간다. 


건배사 문화가 건전한가에 대해서는 각자 대답이 다를 수 있다. 건배사가 술자리 분위기를 띄우고 융합을 강조하는 순기능도 분명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의 건배 문화는 군사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형성됐다는 지적이 있다. 상명하복식의 건배사와 일사불란한 건배 말이다. 한명이 건배사를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마시는 식의 권위적 문화, 군대와 흡사하지 않나. 일반적으로 쓰는 '위하여'라는 충성스러운 구호는 군사 독재 시절 시작된 구호라고 한다. 그 뿌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군국주의의 산물이란 얘기도 있다. 정작 일본은 회식 자리에서 최고 상급자가 처음에 건배사를 하고는 딱히 술을 강권하지 않는 문화라니 아이러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던 조상들의 풍류도 그 식민지배 시기를 거치며 말살된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일본은 1910년대 양조금지령을 내리고 우리나라 전통주를 뿌리 뽑으려고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조상들이 유지해온 권주(勸酒)와 대작(對酌) 문화가 사라진 게 아닐까. 시 한 수 읊고 술 한잔 따르고 그러던 선비들의 문화는 어디로 간걸까.


군부 독재 정권이 마무리된 지 30여년, 나라가 독립한 지는 70년이 다 되어가는데 건배사 문화는 여전히 그 시간에 멈춰있다. 폭탄주 말기, 자기가 마신 잔돌리기는 또 어떤가. 


군국주의 회식 문화는 이따금 고주망태가 되고 싶을 때 좋을지도 모르겠다. 내 돈 주고 취하기엔 술값이 너무 많이 나올 거 같은 날이 회식하기 좋은 날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술에 취할 거면 이왕이면 사극에서나 보던 그런 풍류를 즐기며 취하고 싶다. 포석정에 잔 동동 띄워서 안동소주 한잔 들이키면 딱 좋겠다. 술잔 돌아오기 전에 흥 돋우는 덕담도 한마디 하고. 이렇게 마시면 술맛도 살아나지 않을까. 이태원에 잔 띄우는 술집 하나 생기면 기가 막히겠다. 혹시 이태원 포석정이 생기거든 내 꼭 한잔 따르리라. '받으시요 받으시요 이 술 한 잔을 받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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