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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Jun 19. 2023

낮술, 귀한 낮술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마법의 한 잔

낮술이 좋다.

시작부터 주정뱅이 같다.


 학교 때 처음으로 밝은 대낮에 술을 마셨다. 이렇게 좋은 것이 있었다. 아무도 이것만이 진리라 하지 않았는데 왜 술은 당연히 밤에 마시는 것이라는 네모난 생각을 했을까. 무언가 빠작 깨이며 진정한 자유인이 된 기분이 들어 당장에 낮술을 좋아하게 됐다.


 저녁에도 다양한 이름이 붙은 술자리에 참석하던 시기였지만 낮술은 단출하게 마셨다기미 따위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광합성이 필요하다며 일부러 햇볕이 잘 드는 잔디밭을 찾아 앉았다. 한 모금 마시고 햇볕에 유리병을 비추면 그 안에 공기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병맥주가 낮술에는 딱이다. 

@pixabay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꽂고 음악을 듣고 주력이 필력이라며 멀쩡한 도서관 놔두고 취중 리포트를 써댔다. 맥주 한 병 기운에 잘 넣어두었던 속이야기가 나와 수업을 다 째고 밤까지 이어 마시기도 했다.

 어두운 시간의 술보다 훨씬 더 적은 알코올 한껏 기분이 좋아지고 쉽게 마음을 열게 되는 마법의 기운 같은 것이 낮술에는 있었다.


 그때 낮술을 더 많이 누렸어야 했다.


 사회생활에 덧붙여 육아가 시작되니 낮술 한잔 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닌 거다. 이제 란 것은 마음먹는다고 아무 때나 즐길 수 있는 만한 존재가 아니다. 지금 낮술을 좋아하는 건 게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이다.


 회사에 매어 있으니 일주일에 5일이 빠진다. 물론 휴가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워킹맘처럼 아이 일만으로도 빠듯하다.  

 아이를 돌보 할 일이 오롯이 남아 있는 대부분의 주말 역시 불가능하다. 알딸딸함을 한껏 누리며 잠깐 널브러져 있어도 아무 지장 없이 하루가 굴러갈 흔치 않은 날이어야 한다. 

 그뿐인가. 운전이 은근 발목을 잡는다. 여행을 가서도 저녁 술은 흔히 마실 수 있지만 낮술은 쉽지 않은 이유다. 

 우리 중 누군가가 올라오는 술기운을 참아가며 뒷정리를 해야 한다면 온전히 편안한 낮술을 즐길 수가 없다. 밖에서 남이 차려준 맛있는 걸 먹는 호사를 누릴 때가 낮술의 시간이다.

 혼자는 커피다. 술은 딱히 당기지 않는다.  같이 마실 마음이 딱 맞는 사람은 필수 조건이다.  


 이 어려운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먹을 수 있는 게 낮술이다. 마침내 그 희박한 기회가 오면 이제 낮술은 선택이 아니다. 꼭 마셔줘야 하는 거다. 안 마시고 넘어가면 두고두고 아쉬울테다.

@pixabay

 안 그래도 행복한 그 시간.  낮에 가운 맥주 한 잔을 마시면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다. 부러운 사람이 없다.


 그 귀한 낮술을 마셨다. 

 한참 수다 떨다 목을 축이느라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술부터 마맥주 한 모금이 빈 속차갑게 타고 내려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지며 감격의 '크' 소리가 절로 난다. 뭘 먹어도 이 집이 맛집이다.

 한 잔을 채 비우기 전에  바로 흥이 난다. 역시 낮술은 가성비가 좋다. 이 조금에도 이렇게 신 날 수가 없다. 공복에 순식간에 올라온 취기에 손이 풀려 뚝 떨어뜨린 반찬마저 재미지다. 냉기에 차가운 물방울들이 살짝 배어 나오는 잔을 짠 부딪칠 때마다 아까까지 걱정하고 있던 일들은 별 것이 아닌 게 된다. 쓸데없이 하고 다니는 긴장이 풀리며 단순한 사람이 된다. 몹시 바람직하다. 

@pixabay

 딱 기분 좋은 그 상태로 휘적휘적 걸으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지면의 아지랑이가 한낮의 열기 때문인가 나의 취기로 인한 것인가를 평소의 삼분의 일만큼의 속도로 돌아가는 머리로 생각해 본다. 다채롭게 주제를 달리하며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잡생각들이 낮술 덕에 차츰 사라진다. 궁극에는 머리는 모두 비운 채 사지만 움직이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 정도면 득도에 가깝다.

 해가 지기 한참 전에 이미 모든 알코올 기운은 사라지지만 귀한 낮술로 얻은 뇌의 평화와 꽉 찬 마음은 몇 달이 간다.


 낮술, 정말 귀한 낮술이다. 

 올해는 귀한 낮술을 더욱 많이 마셔야겠다. 

 글 마무리도 주정뱅이 같지만 수미일관이 별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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