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살이 붙지 않을까를 고민하며 젤리 영양제까지 먹이던 아이 모습이 '이제 보기 좋다' 싶었던 것은 아주 잠깐. 곧이어 주변에서 우려의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갱년기는 개의치 않았다. 또렷하던 이목구비가 살들에 묻혀 두루뭉술해진 것을 알았을 때도 아이의 토실토실한 뒤태와 둥근 손등을 문지르며 흐뭇해했다. 아저씨마냥 뚝배기를 비스듬히 걸쳐 세워놓고 찌개의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먹는 모습에도 웃음만 나왔다.
그런데. 기어이.
사춘기 입에서 '엄마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된 거야'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건 드라마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자아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이 방문을 쾅 닫으며 내지르는 대사인데.
깡 말랐던 시절 뾰족한 턱선과 얄상한 라인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둥그런 사춘기의 웃음기 없는 말에 갱년기도 움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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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춘기는 다이어트를 선언한다.
다이어트의 최대 적은 '진짜 안 먹을 거야?'이러며 애써 누르고 있는 식욕을 자극하면서 먹는 옆사람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몹시도 잘 알고 있는 갱년기는 사춘기의 다이어트를 전폭 지지하는 차원에서 함께 야식을 끊고 식단을 조절하기로 한다.
사실 사춘기만 시급한 게 아니었다.
갱년기에게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사람별로 몸무게 추이를 기록하던 저울이 갑자기 늘어난 몸무게에 갱년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달라'했을 때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야식을 끊지 못했다.
임신 때 보고 보지 못했던 몸무게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허얼'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생명력 강한 식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개수가 별로 없는 옷들이 하나같이 작아져 미니멀 라이프를 위해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아주 약간 식사량을 줄였더니 바로 이명이 들린다. 6개월 간 두 번의 이석증으로 반년을 고생했기에 내가 지금 살을 뺄 때가 아니며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아주 합리적인듯한 핑계를 댔다. 결국 바지를 여러 벌 샀다.
사춘기와 갱년기는 의기투합한다.
먹는 것을 확 줄이는 파이팅 넘치는 다이어트의 실패사례를 본인과 주변의 경험으로 익히 잘 알고 있는 갱년기. 무리한 계획은 짜지 않는다. 특히 성장기 사춘기를 위해 야식과 라면, 음료수만 줄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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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릇보다 컵이 많이 나오는 작은 집.
컵 욕심까지 있어 큰 부엌 수납장을 가득 채웠던 컵들을 작은집으로 이사 오며 많이도 처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식기류에 비해 컵은 현저히 많다.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컵을 모두 사용한다는 것. 물부터 각종 음료수까지 쉴 새 없이 마신다.
사춘기를 위해 늘 냉장고를 채우던 액상과당을 줄인다.
레모네이드와 아이스티까지는 끊지 못했지만. 늘 쟁여놓고 마시던 망고주스를 주문하지 않고 토마토나 자두를 간다. 꿀을 마음껏 넣으니 달콤하지만 이건 건강에 좋을 거라며 우긴다.
갱년기는 차마 커피는 줄일 수 없지만 라테를 참기로 한다.
아껴놓았던 마지막 연유를 부어 달지만 달지 않은 연유라테를 즐긴 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여름 더위에 안 그래도 매일매일 끓였던 물을 하루에 두 번씩, 주말엔 세 번씩도 끓인다. 1.7 리터의 주전자를 가득 채워 끓여놓은 작두콩차를 식혀 냉장고에 넣어두느라 온 집안 물통이 총 출동한다. 부지런히 얼음통을 채우고 밀폐용기 네 개를 꼬박꼬박 얼린다.
매일매일 몸무게를 재서 벽에 붙이겠다며 사춘기가 의지를 불태운 첫 날짜는 06.02.
이미 두 달이 지났는데 사춘기의 몸무게도 갱년기의 몸무게도 그대로다. 초반에 아주 잠깐 줄어들긴 했으나 원상회복.
다이어트를 위해 샐러드를 먹겠다는 사춘기는 치킨만 다 골라 먹고 야채를 남긴다.
끼니때는 라면을 끊겠다며 밥을 먹어놓고, 자꾸만 밤중에 '라면 딱 한 개만 딱 한 개만'을 주문처럼 왼다.
각자 나름의 운동을 했다며 뿌듯해하면서 분식집에서 1인당 2개씩의 메뉴를 시키고 있다. 운동 직후 활성화된 몸은 당분을 즉각적으로 흡수하는 기분이다.
식사 대용으로 먹겠다고 새로 구입한 미숫가루는 자꾸 후식으로 먹는다.
날씨가 더우니 식욕이 없다는 건 집에서 내가 직접 만들어 먹는 메뉴에만 국한되는 말인가 보다.
입맛이 없으니 나가 먹을까 하고 남이 해 주는 음식을 마주하면 식탐이 샘솟는다.
사이좋게 다이어트를 결심한 갱년기와 사춘기는 메뉴 선정을 놓고 기싸움까지 하며 식탐을 발산한다.
일주일에 최소 한 번 이상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일부터 다이어트할게' 소리가 나온다. 마지막 만찬이라며 평소보다 더 많이 맛있게 먹는다.
두 달간 몸무게는 변화가 없다.
확연한 변화를 보인 것은 매 끼니가 몹시도 맛있다는 것.
오늘만 먹고 내일부터 안 먹겠다고 다짐하고서 한밤 중 먹는 라면은 얼마나 맛있으며, 그 옆에서 오늘 딱 한 캔만 마시고 내일은 안 마시겠다며 김부각 한봉 뜯어놓고 마시는 맥주는 또 얼마나 맛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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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와 갱년기의 다이어트 계획은 내 앞에 놓인 음식에 감사하며 매번 마치 이것이 마지막 만찬인 듯 최선을 다해 맛있게 먹자는 다짐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