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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시와 할머니들

by 햇살처럼

재작년 가을인지 초겨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할머니들 만나러 가면서 ‘뭘 들고 갈까?’하고 과일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살펴보니 주황빛 연시가 참 맛있어 보입니다. 대봉이 더 탐스러워 보이는데 덜 익어서 바로는 못 먹는다고 합니다. 연시를 계산하는 나는 얼굴에 미소가 막 올라옵니다. 한 팩에 만원도 안 되는 걸로 할머니들 앞에 가서 생색을 낼 수 있거든요. 할머니들은 왜 이런 걸 사왔냐고 하지만 말랑말랑한 연시를 그 자리에서 아주 맛있게 드십니다. 먹는 사람도 좋고 그걸 바라보는 저도 좋습니다. 사과는 사가지고 가면 냉장고로 직행이지만 연시는 그 자리에서 같이 웃으면서 먹을 수 있습니다. 이가 션찮은 할머니들이라 딱딱한 것은 못 드시거든요. 그래서 휴지로 쓱 닦고 껍질 살살 벗겨 잇몸으로 씹어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연시가 딱입니다.

웬 할머니들이냐고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친정엄마 불평을 누군가에게 막 털어놓았습니다. 자신의 수명이 일흔 둘이니, 나 죽으면 후회하지 말고 잘하라는 친정엄마. 그래요, 잘 하고 싶지요. 어떤 자식이 자기 부모에게 잘못하고 싶겠습니까. 다만 힘이 드니 적당히 하고 싶은 것이지요. 저도 살아야 하니까요. 울 엄마는 저를 무척 좋아합니다. 남편 대신 아들 대신입니다. 제가 울 엄마를 잘 챙겨야 하는데, 워낙 씩씩한 분이라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더니 그게 화가 나서 저만 보면 뭐라도 꼬투리를 잡습니다.

동네 나이 좀 먹은 언니는 친정엄마를 향한 제 불만을 듣고 나서는, 좋은 일 좀 하라며 세 할머니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여든이 다 되고 넘은 할머니들인데, 젊었을 때는 한동네에서 친구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시일이 흘러 다른 동네에 집을 사면서 떨어졌는데, 그리 멀지 않아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났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리들이 아파 힘들다는 것입니다. 엄마 불평 그만 하고 할머니들 챙기면서 엄마를 고마워하라는 나이 좀 먹은 언니의 처방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 할머니와 인연이 되어 한 달에 한 번 만나 누룽지를 같이 끓여먹고, 막 나온 따끈 따근한 두부도 간장 뿌려 먹고, 일회용 손 장갑 팩으로 예쁜 손 만들자며 같이 마사지도 하고 그랬습니다.

세 분 할머니들은 녹천역, 쌍문역, 석계역 가깝게 삽니다. 집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지하철까지 걸어 나오는데 10분이 안 걸리지만 할머니들 걸음으로는 30분은 잡아야 합니다. 중간 중간 쉬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운전 잘 하는 제가 두 할머니를 모시고 녹천역 왕 언니 집으로 갑니다. 때로는 쌍문역이랑 녹천역을 들러 석계역으로 가기도 합니다. 할머니들은 모이면 길어야 1시간 반, 집에 가서 편히 쉰다고 오래 있지도 않습니다. 저도 아이들이 학교 간 새에 한 바퀴 도는 거라 바삐 집으로 와야 하고 오고 가는 시간이 있어 막상 만나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들은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는 걸 무척 좋아 했습니다. 할머니들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하고 또 합니다. 저를 처음 봤기 때문에, 몇 십 년 된 이야기를 신나게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랬냐고, 힘들었겠다고, 어떻게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냐고. 만나면 듣고 또 들은 이야기들이지만 손잡아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끄덕끄덕해줍니다. 어찌 보면 ‘나 젊어서 살기 힘들었다. 그 힘든 시절 잘 지나서 지금 편히 산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세 분 할머니는 노년이 편안합니다. 다 자기 집이 있고 용돈 주는 자식들이 있어 걱정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별 걱정 없습니다.

일흔 여덟 막내 할머니는 이야기합니다. 내가 아들이 다섯이야. 할아버지가 돈을 안 갖다 줬어. 돈 벌면 자기 쓰기 바뻐. 지금도 옷 사면 한 번 입고 버려. 빨지를 않아. 아까워서 입을만한 거는 몰래 주워놨다가 내가 입지. 내가 힘들게 벌어서 다섯을 키웠어. 다 잘 되어서 지금은 효도해. 하나만 딸 되었으면 좋은데 어쩔 수 있어. 내가 딸 복이 없어 그러니께. 막내 할머니는 정신도 또렷하고 귀도 밝아 말도 차분하게 잘 합니다.

두 언니들은 고개를 끄덕끄덕 들어줍니다. 두 언니들은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둘째 할머니는 막내 할머니의 입모양을 보고 대충 알아듣습니다. 둘째 할머니는 그냥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는 게 좋을 뿐입니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왕 언니는 풍을 세 번 맞고 치매 끼도 있어서 두 할머니가 말하면 그냥 웃기만 합니다. 말하기도 힘들다며 거의 들어줍니다.

둘째 할머니는 나는 자식들한테 한 번도 화를 안 냈어. 내가 해 준 게 없는데 알아서 잘하니까 화 낼 일이 없었어. 지금은 할아버지가 요양원 가 있으니 내가 그렇게 좋네. 할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내가 맘 편할 날이 없었어. 넷째 딸이 간호사로 있는 요양원이라 더 좋아. 딸이 알아서 잘 챙기니까. 시골서 아무것도 없이 서울 왔는데, 할아버지가 뭔 맘을 먹었는지 지금 집을 사놔서 내가 고생 안 하고 살았지.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항상 고마워. 할아버지가 병만 안 났어도 좋은데, 어쩌겠어.

녹천역 할머니는 말합니다. 내가 정신이 없어. 휴대폰도 딸이 몇 번을 해줬는데, 다 잃어버렸어. 나이 먹으면 다 그래요. 그러면서 사는 거죠. 내가 위로 한다고, 연세드시면 다 그런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얼마나 속 터지는지 아냐고. 바보멍청이라는 생각만 든다고. 길도 잃어버릴까봐 어두워지면 아파트에서 못 내려간다고. 한 번은 쓰레기 버리러 내려갔다가 집을 못 찾아 얼마를 헤매다 집에 왔는지 모른다고. 눈물은 흘리지 않지만 거의 울 듯합니다. 저도 그냥 이야기를 들어는 드리지만 딱히 해 드릴게 없습니다. 풍이 세 번 왔는데, 입이 돌아가서 침 맞고 치료 받아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대신 정신이 깜박깜박 할 때가 많아서 걱정이라고 하네요. 아파트에서 재활용 버리러 내려가면서도 이 길 잃어버리고 못 올라올까봐 걱정하면서 다닌다고 합니다.

세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몇 살 아래 친정엄마가 참 고마웠습니다. 핸드카 하나 끌고 경동시장 가서 이것저것 담아오는 친정엄마. 버스비 아낀다고 지하철 타고 오는 친정엄마. 할머니들 만나면서 조금은 젊은 친정엄마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지요.

작년 2월부터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 분 할머니들도 못 모였습니다. 어쩌다 가게 되면 대문에서 인사만 하고 조용히 오곤 했습니다. 마스크도 쓰지 않고 웃으면서 나오는 할머니에게 마스크는 꼭 쓰라고 당부하고 돌아섰습니다. 할머니들은 아무것도 안 먹고 가서 어쩌냐고 아쉬워들 했지요.

작년 초겨울까지 석계역, 녹천역 할머니들은 그래도 잘 지냈는데, 쌍문역 할머니가 한 달 아팠다고 했습니다. 채 해서 먹지를 못했다고요. 간신히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석계역 할머니가 막내 할머니에게 가자고 합니다. 코로나 할아버지라도 산 사람 만나자고요.

그날도 연시를 샀습니다. 석계역, 녹천역 들러 쌍문역 할머니댁에 모였습니다. 종이컵에 연시 하나씩 넣어서 나눠드리고 막내 할머니꺼는 휴지로 꼼꼼하게 닦아 살살 껍질을 벗겨 드렸습니다. 입맛이 없다고 하였는데, 같이 먹어서 그런지 연시 하나를 잘 드셨습니다. 목 넘김이 부드럽거든요. 하나를 더 드릴까 했더니 배가 부르다고 하네요. 할머니들은 막내 할머니 힘들다고 연시 하나 먹고 일어납니다. 한 바퀴 도는 시간이 머무르는 시간보다 더 깁니다. 잠깐 있다 갈 것을 왜 왔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듭니다. 할머니들은 막내 할머니와 한 번씩 끌어안고는 아쉬어 하며 천천히 신발을 신고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65세 이상 대상으로 미술놀이 프로그램이 있어 친정 엄마를 신청했더니 일주일에 하나씩 미술놀이가 배달되어 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연락도 안 하고 문 앞에 조용히 놓고 갑니다. 엄마는 중학생 손녀와 미술놀이를 같이 하며 이게 치매 예방이냐고 웃으면서 묻습니다. 예전 같으면 내가 치매냐고 화를 냈을 거를 이제는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세 할머니를 만나면서 저도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변했습니다. 엄마의 외로움과 나이듬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이제 가을이 되어 연시를 사도 다 같이 모여 먹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무지개다리, 면회가 안 되는 요양원은 저에게 추억을 꺼내며 웃음짓게 합니다. 다만 나이를 먹으면 이가 아닌 잇몸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귀도 약해져도 소리가 아닌 입 모양으로 상대의 말을 대충 듣는다는 것을, 치매가 오면 현관문을 나설 때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 하나 짧은 시간이라도 모여서 얼굴 보는 것이 좋을 뿐이지 이러쿵 저러쿵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 무척 귀하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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