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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자존감의 원천

by 윤병옥

자신이 초라해서 힘들 때가 있다.

사회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큰 성취를 이룬 것도 없고,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절실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내가 미미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고 인생이 뜻대로 되지않아서 실망할 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나이 들어 친구를 사귀기가 힘든데, 운이 좋게도 취미모임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많은 사람 중에서도 품위가 있고, 타인에 대한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모임에 여러 사람이 있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인데도 그녀는 누군가 다가오면 곁을 내주는 사람이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친해진 뒤 그 비결을 물으니, 그 어떤 사람도 단점만 있지는 않고 장점도 있어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였다. 머리로는 아는 말이지만, 나처럼 까칠한 사람은 상대방에게 나와 맞지않는 점이 있다고 판단하면 그 사람과 접촉을 안 하는 쪽이어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부끄러웠다.

친구와의 인생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대학생 때의 추억이다. 노는 것을 좋아하던 젊은 시절에 그녀도 저녁때까지 놀다가 늦게 들어가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집에 가는 골목에 접어들면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 의자를 두고 왔다 갔다 하며 그냥 바람 쐬는 척하면서 막내 손녀 들어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시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그러면 손녀는 속으로는 가슴이 따뜻해졌지만 겉으로는 짜증을 내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말하고, 함께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막내 손녀 사랑은 유별나셔서 어릴 때는 호떡을 사서 식을까 봐 옷 속에 품고 오셔서 막내만을 몰래 불러서 주셨다고 한다. 이런 경험이 오래도록 쌓이면서 친구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마음에 새긴 것 같다. 진정한 자존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자존감이 형성되면 살면서 힘든 일이 생겨도 자신을 포기해 버리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특정한 일이 잘되지 않더라도 내 존재가, 또는 인생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이들이 그러한 존재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직장에 다녔었다. 연년생 아들 둘을 놔두고 직장에 다니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큰아들은 하루 종일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돌봐주시는 아주머니가 주시는 음식을 먹지 않았었다. 내가 퇴근하고 돌아와서 먹이는 저녁이 그날 먹는 음식의 전부였었다. 그때 통통하던 아들은 빼빼 마르고 성장이 더뎌졌다. 퇴근하면 집에 밀린 집안일과 밥도 안먹고 기다리는 아들이 있었다.

작은아들은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엘리베이터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나를 기다리다가, 회식이라도 있어서 늦게 되는 날이면 실망해서 저녁도 안 먹고 초저녁부터 들어가서 잠을 잤다. 실망하여 자고 있는 아들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결국 에너지를 무리하게 쓰게 된 나의 건강 악화까지 겹치기는 했지만, 직장을 그만두게 된 주된 이유는 나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시간에 충실했다는 것을.

나도 기억할 것이다. 그때 그들이 온 마음 다해 엄마를 사랑하고 기다렸다는 것을.

자신이 누군가에게 간절하게 기다리는 중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인생에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이겨낼 힘이 된다. 이렇게 애착 경험이 만들어준 자존감은 때로 힘든 일이 생겨도 존재를 지탱하게 해 준다.


*앤나우 작가님께서 제 책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에 리뷰를 써주셨습니다.

너무 훌륭하게 잘 쓰셔서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https://brunch.co.kr/@gstrings/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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