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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대신 식료품 장보기

장보기

by 둥이

아내 대신 식료품 장보기

"오빠 들어오다 장 좀 봤다 줄 수 있어"

"응 톡으로 모 사면되는지 보내줘"


아내가 보내준 빼곡한 식료품 목록을 하나하나 읽어 나간다. 매일은 아니지만 아내는 가끔 나에게 장을 보고 오라고 연락할 때가 있다. 몸이 안 좋다든가 아이들 때문에 시간이 없을 때 장보고 오라는 연락을 한다. 안 해본 남자들은 장 보는 게 뭐가 어렵냐며 웃을 수도 있지만 이게 그리 쉬운 것이 아니란 건 몸소 해봐야 알 수가 있다.

사야 될 식료품 중에는 대강은 알 수 있는 것과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것들이 항상 몇 개씩은 들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것들이란 이런 것 들이다.


"햇반 3개, 배 1개, 계란 2개"


햇반 3개를 사기 위해 햇반 진열대를 찾아보았지만 햇반은 낱개로 판매되고 있지 않았다. 3개씩 묶여서 1팩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3팩을 사기엔 너무 많은 듯했다. 그렇다고 1팩을 산다는 것도 크게 당기지는 않았다. 아내가 원하는 정확한 것을 알고 싶었던 게 더 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심각한 고민은 결정 장애를 겪는 사람처럼 사람을 난데없이 난처하게 만든다. 배 한 개를 사 오라고 이 또한 배 세 개를 한 묶음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계란 역시 10개를 포장해 놓은 것과 20개를 포장해 놓은 것 두 종류가 있었다. 20개짜리 하나를 사자니 굉장히 많아 보였다. 차라리 신선한 계란을 자주 사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남자들의 장보기는 이런 하나마나한, 쓸데없는, 본전도 나오지 않는 고민을 시작으로 정작 식재료에 가장 중요하게 봐야 되는 식료품의 싱싱함 이라든가 유통기한 이라든가 출산지가 어디인가 등은 찾아보지도 않은 채 거의 매뉴얼처럼 맨 위에 올라와 있는 식재료를 덥석 집어든다. 그러니 장을 보고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어주는 것까지 하고서도 싫은 소리를 잔뜩 듣게 된다. 이런 경우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 내 눈에는 안 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찾다 찾다 못 찾을 때 약간은 화가 나서 식재료 직원한테 물어보게 되는 경우다. 몇 번을 가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식재료는 항상 있었고 그때마다 매장을 두어 번 돌다 찾기를 포기하고 직원한테 물어보게 된다.


"저 죄송한데요 두부는 어디 있나요"

"아 두부요 손님 비로 앞에 있네요 여기요"

"아 그러네요 왜 제 눈엔 안보일까요"

"또 죄송한데요 장조림은 어디 있나요"

"아 장조림이요 두부 바로 위칸에 있어요"

"아 그러네요 이렇게 잘 보이는 데 있는데 왜 ㅇ못 봤을까요"

"아버님들이 장 보러 오시면 대부분 못 찾으시더라고요 담부턴 안 보이는 건 고민하지 마시고 물어봐주세요"


하지만 사람은 하다 보면 요령이 붙는 법 ᆢ싫은 소리 몇 번은 사람을 단련시키고 변화시키는 마법을 부린다. 이렇듯 사람은 지극히 길들여지는 종이다. 어린 왕자의 여우나 장미가 하는 말들은 성경에 나오는 말처럼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아내에게 사랑받는 남편이 되기 위해 시작한 장보기 심부름은 서서히 재미가 붙는 시점이 찾아온다.


아내 생일 때만 끓여 주던 미역국이 지금은 아이들이 좋아해서 자주 국을 끓이고 있다. 현정이는 국을 즐겨하지 않지만 끊여 놓으면 잘 먹는 편이어서 이젠 요리에 재미가 붙었다. 그 덕분인지 산본시장을 가는 날이 많아졌다.


산본시장에서 식재료를 고르며 장을 보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일중에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가 텃밭 농사를 지어 농협 로컬푸드에 내어 놓는 무와 대파와 배추를 들여다본다. 어른 종아리 만한 무한개를 가리키며 얼마냐고 물어본다. 하얗게 잘 다듬어진 밑동이 하얀 대파가 몇 개씩 포장되어 있다. 한 단에 얼마인지도 궁금해 물어본다. 물어보고 안사면 괜히 이상하고 창피해서 아이쇼핑만 하다가도 이렇게 확실히 사야 될 아욱이나 무 감자등이 있으면 거침없이 가격을 물어보고 상점주인이 들고 온 아욱을 다시 꺼내 싱싱한 건지도 꼼꼼히 확인한다. 나름 노련해진 것이다.

감자가 강원도 산인지, 키로에 얼마인지, 아욱이 얼마인지, 무 한 개에 얼마인지, 제주도 청무는 맛이 좋은지, 사야 되는 식재료에 묻어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일상적인 현실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은 어느새 내겐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만져보고 물어보는 것은 나에게 꽤나 즐거운 일이 되었다.


가끔 난 아주 작은 것들로 행복해진다. 커피 마니아는 아니지만 커피를 좋아해서 자주 마신다. 내게 맛있는 커피란 연하면서 구수한 향이 진하지 않고 오래가는 그런 커피인데 산본에는 그런 커피숍이 몇 군데 있다. 그런 커피숍에서 아내와 시간에 쫓기지 않은 채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느긋하게 책을 넘기며 커피를 마시는 것은 나에게 있어 작지만 확실한 행복 중에 하나다. 호르몬 분출이 왕성해진다. 그런 작은 행복은 아내 대신 식료품 장보기를 통해서도 만들어진다.


산본시장 안에는 식료품을 파는 상점들이 몇 군데 있다. 재단 위로 예쁘게 진열되어 있는 양배추 대파 아욱 무 배추 상추와 치커리 밤 오이 고추 깻잎 제주도 빨간 무 등을 쳐다보며 그날 먹을 국거리를 생각한다. 감잣국을 끓일까 아니 날씨도 추우니까 아욱국이 좋겠다 결정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래서 아욱 두 단을 사고 있는 그날의 풍경은 작지만 행복한 일이다.


날씨가 추워진 덕분인지 대파 가격이 조금 비싸졌다. 로컬푸드에서 팔리고 있을 아버지의 대파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대파값이 조금 비싸졌다 생각하니 산본시장 대파값이 착해 보였다.


아욱 두 단과 대파 한 단 그리고 제주도 청무 하나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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