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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이 Aug 20. 2024

아내의 입술

아내가 싫어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아내의 입술


그날도 아내는 장롱문을 열였다.

아내는 유난히 냄새에 민감한 편이었는데 처갓집에 들를 때면 장롱 속 베갯잇과 이불솜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냄새를 킁킁 맡는다. 마치 마약 수사견이 누군가 숨겨둔  마약을 찾듯이..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해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낸다. 하나하나 꼼꼼히, 아주 작은 냄새라도 아내의 레이다망을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리고 주방으로 향한다.  싱크대와 개수구 곳곳에 묻어 있는 물 때와 곰팡이를 찾아낸다. 마치 수맥 찾듯이 꼼꼼히, 그렇다.  

아내는 하얗게 피어나는 때론 얼룩처럼 검게 퍼져가는 곰팡이를 무척 싫어한다. 아내의 싫어함을 등급으로 매기면 아마도 아내는 최상위 등급 정도는 거뜬히 넘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조차 아내에게는 극혐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그걸 청소 안 하고 방치한 사람도 혼쭐이 난다. 대신 아내에겐 그 반대로 책꽂이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어야 한다든가 냉장고 반찬들이 이리저리 쌓여 있다든가 책상 위 필기구와 읽던 책들이 흐트러져 있다든가 전화를 받으며 대충 적어둔 메모지가 소파 한쪽 구석에 쌓여 간다든가 하는 각각의 물건이 제위치에 있어야 된다는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을 정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다. 신기한 일이지만 나에겐 책꽂이의 책의 위치들이나 책이 꽂혀 있는 방향과 높낮이, 책상 위가 깨끗해야 되는 것과 옷걸이의 옷들이 색깔별로 옷종류별로 걸려 있어야 되는 거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건 하루의 기분과도 연관되어 있어서 나는 되도록 쓸고 닦고 정리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그와 반대로 아내는 세균이라 든가 곰팡이라든가 냄새라든가 어찌 보면 건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곰팡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박멸해야 된다는 의식 수준에는 도달하지를 못해 가끔 아내의 잔소리를 듣곤 한다.

아내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

아내는 장롱 속 옷가지와 이불에서 풍겨 나는 냄새와 주방과 화장실 습기가 있을만한 곳에서 피어나는 곰팡이에 몹시 민감한 여자다. 가끔 친정집에 들를 때면 장롱 속과 주방의 청결상태는 아내의 기분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와 반대로 나는 다르다.



나는 묵은지의 골마지와 잘 익은 오이지에서 풍겨 나는 삭힌 냄새를 좋아한다. 나는 장록문을 열 때 묻어나는 특유의 옷냄새라든가 화장실의 물때라든가 이런 일쯤은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치 그건 사람이 살다 보면 당연히 날수밖에 없는 인간 냄새 정도로 여겨질 때가 있다. 어찌 보면 나는 보이는 것에 민감하고 아내는 느끼고 만져지는 것에 민감한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세탁기 사용법도 눈여겨 볼만한데 그냥 생각 없이 세탁기를 돌렸다가는 널어 놓은 세탁물을 다시 돌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세탁법이란 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하자는 것인데도 내가 하는 방법과 크게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이 역시 민감한 아내에게는 중요한 문제이다.

즉 세탁기의 물조정은 세탁물에 맞추어 조정하고 헹굼은 두 번 그리고 끝나면 다시 빨래를 뒤집어(겉과 속을) 안쪽에 묻은 이물을 다시 헹굼을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거는 세탁이 끝나고 되도록 빨리 오분을 넘지 않게 재빨리 꺼내서 베란다에 널어주는 것이다. 혹시나 깜박 잊고 한두 시간 늦게 빨래를 꺼내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사이 습기와 곰팡이로 인해 옷에 냄새가 베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결벽증 까지는 아니다. 유난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절대 예외를 두지 않는다. 아내는 자기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벗어난 것들이 생기면 어느 날 조용히 묻어 두었던 말들을 꺼내 묻곤 하는데 그건 마치 불현듯 생각이 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우아함을 놓지 않겠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어쩌다 생각난 거라기보다는 며칠을 고민해서 꺼낸 말이란 걸 입술 모양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내는 화가 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있으면 목소리는 또랑또랑 해져 아나운서 톤으로 변해간다. 여러 생각이 실제 말이 되어 나오기까지 굳게 닫힌 입술 주위로 감정들이 모여들여 경직된 입술 근육만 보더라도 아내의 기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아내의 입술 근육은 내가 아내에게 다가서야 될지 물러나야 될지를 결정해 주는 단서가 되는데 이건 그나마 아내 곁에 살게 해 주는데 도움을 주는 더듬이 역할을 해준다. 마치 꿀벌의 더듬이처럼,  더듬이만으로 일곱까지 감각을 느끼는 꿀벌의 더듬이는 그야말로 대단한 감각기관임을 다시 느끼게 된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아내를 볼 때면 눈보다 입술을 먼저 보게 되었다. 오늘 아내의 기분이 입술 그곳에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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