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꽂히는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
나는 평소(드문 일이 긴 하지만) 목소리 좋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그런 때는, 전화 통화를 몇 번 했던 일면식도 없는 부동산 사장님이, 대뜸 목소리가 좋으신데요 하며 악수를 나눌 때도 있었고, 보험 상품을 소개하던 보험회사 여직원이 인사 말미에 목소리가 좋다고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대학 다닐 때도 후배들한테 가끔 목소리 좋다는 이야기를 듣던 때도 있었다. 그게 목소리까지 좋았다는 이야기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뭐든 좋다고 하니 나쁘지 않았다.
목소리는 그 사람의 첫인상에 마치 메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목소리가 좋았던 사람이라는 거는 기억이 난다. 그날 나는 그렇게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를 우연한 장소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다.
사람마다 목소리에는 특색이 있어서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 사람임을 알게 해 준다. 어떻게 보면 목소리는 얼굴만큼이나 신분을 보증해주기도 한다. 그 사람임을 알게 해주는 지문이나 족척처럼, 또 하나, 목소리에는 대단한 반전이 숨어있기도 한다. 예쁘장한 얼굴에서 나오는 바리톤의 굵은 목소리라든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한 기자의 목소리가 가래가 낀 것 같은 허스키한 목소리라든가, 허우대가 좋은 덩치 큰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고운 미성의 목소리라든가, 목소리의 반전은 언제나 드라마틱했다.
그날은 건강검진 피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병원 근처 상가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병원 직원은 "금식하고 오셨죠"한번 더 확인을 했다. 주삿바늘이 혈관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잠깐 따끔거렸지만, 따끔거리기 전까지, 뾰족한 주삿바늘을 보고 있는 게 더 힘들었다.
녹색혈관 안에서 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빨간 피는 마치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혈관 안을 채우고 있었다. 투명한 주사기 안으로 검붉은 액체가 채워져 갔다. 저렇게 빨간 피가 혈관 안에 흐르고 있다는 걸,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사람이 있을까 피검사를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딱 저만큼만 뽑아서 검사를 하면, 건강상태를 알 수 있다.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피검사를 마치고 은행에 들렀다.
이상했던 건 언제 가도 은행 창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였다.
요즘은 대부분은 핸드폰으로 은행업무를 본다. 몇억이나 되는 전세금을 보낼 때도 앉은자리에서 송금을 한다. 모 이런 것은 IT시대에 전혀 이상한 게 아니어서 관리비나 세금이나 교통벌금도 핸드폰을 이용한다. 심지어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과 동호회 회비까지도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시대다. 이렇게 모든 은행업무를 앉은자리에서 핸드폰으로 처리하는 시대인데도, 왜 항상 은행창구는 한 시간을 기다려야만 간신히 창구 의자에 앉을 수가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내가 하려는 얘기는 이런 이야기는 아니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짜인 매뉴얼처럼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띵동 띵동 114번 이 나오려면 세명이나 기다려야 됐다.
앞에 앉으신 할머니는 귀가 안 좋으신지 창구 직원은 큰 소리로 할머니께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큰소리로 할머니께 설명을 해주는 직원이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이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는 어떤 목소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건 그냥 알 수가 있다. 귀에 와닿는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분명 어제도 들었던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들게 해 주었다.
본능적으로 나의 목은 몸에서 쑤욱 뽑아져 나와 창구안쪽의 여직원분에게 향했다.
나는 아주 잠깐 혼동은 되었지만, 어제도 들은 그 친근한 목소리가, 내가 지금 확인한 은행 직원의 얼굴과 동일 인물로 간주하는 데는, 은행에서 요구하는 신분증이라든가, 공인인증서라는 자기임을 증명해 주는 신분증은 필요치가 않았다. 그걸 내가 요구해서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 여자분은 나의 신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귀가 안 들리는 할머니를 상대하고 있었다.
어제도 엘리베이터에서 들은 그 목소리가 은행창구에서 금리와 예금에 대해서 할머니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어떤 사람의 직업을 안다는 게, 그리고 또 예상치 못한 데서 그 사람을 만난다는 게 , 다 영화 속 "우연치고는 이런 인연이"이라는 대사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다.
난 오늘 그 "우연치고는 이런 우연이"라는 대사를 조용히 혼자 되뇌었다. 그리고 띵똥 나의 번호가 올라왔다. 난 맨 끝창구에서 손을 번쩍 들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다른 여직원을 보았다. 그 동작은 친한 친구를 보았을 때나 나올 듯한 손동작이었다.
아마도 그 할머니가 귀가 잘 들리시는 할머니였다면, 그도 아니어서 내가 방금 전 병원에서 조금 일찍 나왔더라면, 그래서 병원 앞 쌍방향 녹색신호등을 세 발짝 앞에서 놓치지만 않았더라면, 난 그 목소리를 우연히 듣고, 네 차례가 되어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리는 창구로 다가가, 마스크를 내리며 환히 웃었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근무하시나요?
이런 우연이 있나요"
몇 달 전 18층으로 이사 온 옆집 여자는 두 딸아이의 엄마였다. 두 딸아이는 오고 가며 옆집 아저씨인 나와 눈인사도 해주고 반갑게 인사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 덕분일까 두 딸아이의 엄마 아빠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안부 인사 정도는 나누는 이웃이 되었다.
귀여운 두 딸아이의 엄마는 목소리가 허스키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누는 아주 작게 그 목소리가 들려와도 뭔가 목에 탁탁 걸리는 허스키한 목소리는 가수 윤복희를 연상케 했다.
허스키보이스의 이웃집 여자는 예상치도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꾀꼬리 같은,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만 있을 것 같은 은행창구 직원들 속에 유난히 빛나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난 은행 업무를 보고 나가면서 아는 체를 할까 고민도 했었지만,
아직도 귀가 어두운 할머니께 예금 금리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직원 앞을 지나쳐 갔다. 내일이라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은행에서 일하시죠 하며 인사를 해야 되는 건지 고민을 하면서 은행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