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없는 하루

어느 가을날 행복 이야기

by 둥이

어느 가을날에


가을비가 내린다.

흙냄새가 더 진해진다. 우산 위로 딱 좋을 만큼 비가 내려앉는다. 산책길로 들어서자 비에 젖은 나무향기가 눈에 보일 듯 다가온다. 더위가 물러난 자리, 계절은 우선 채도를 잃어간다. 가을은 색으로 온다. 다홍색 빛으로 서서히 채워진다.


도서관 가는 길, 햇볕은 낙엽 위에 앉아있다. 비가 온 다음날, 수리산은 더 선명해져 있다. 나무 그늘 밑으로 걷는 산책길이 즐겁다. 걷기 좋은 계절이다.

내 오른손을 잡고 곁에서 걷고 있는 열두 살 아들의 보챔이 싫지 않다. 가끔 이럴 때면 꿈속을 걷듯 정신이 흐릿해진다. 좋아서, 지금이, 오늘이, 지우개로 지우듯 생각이 지워진다.


한 시간 반,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는다.

에밀졸라의 제르미날은 나를 순식간에 책 속으로 잡아당긴다.


"라마외드는 단호한 태도로 메그라의 상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에게 거듭 간청한 끝에 빵 두덩이 와 커피, 버터 그리고 100수까지 기어이 빌렸다."

<에밀졸라의 제르미날 1 p155>


라마외드는 우리 시대 엄마를 닮았다. 어느 시대건 엄마의 모습은 강하다. 살기 위해 부단히 강해진다. 여자는 아이를 뒤에 업고 두 아이를 앞세워 메그라의 상점으로 들어간다. 커피 한 모금과 빵 한 덩어리 일곱 명의 아이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엄마는 못할 게 없어 보인다.


책을 읽기에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고속 충전기처럼 나를 충전시킨다. 방전된 에너지를 채워준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행복해지는데 많은 게 필요 없다. 비교적 단순하고 간단하다.


이제 몇 달만 지나면 아이들은 열세 살이 된다. 자고 일어나면 아이들은 성큼 자라 있다. 마치 하루새 대나무 마디가 한 마디씩 커가는 것처럼, 발목과 목선이 길어진다.

얼굴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팔다리도 길어지고 얼마 안 가 목소리도 변할 것이다. 차츰 남자로 변해가고 차츰 성인이 되어간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때론 빨리 컸으면 하는 맘이 들다가도, 때론 이대로 조금 더디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아이들은 콩나물시루에서 콩나물 자라듯이, 쑥쑥 커간다.


열두 살 쌍둥이 남자아이들은 눈치는 없지만 촉은 좋다. 열두 살 나이에 눈치가 없으면 얼마나 없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은, 늘 그렇듯 평균이상이란 게 존재하는 법, 열두 살 아이들은 사오정처럼 들리는 데로 듣는다. 그건 이상할 것도 없다.


열두 살 아이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을, 분석보다는 직감을, 해야 할 일보다는 하고 싶을 일을 먼저 한다.


열두 살 아이들과 캐치볼을 하고 야구를 하는 사이, 학교 운동장 담장 너머로 아내가 걸어온다. 아마 멀리서도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운동장 안을 가득 채운 아이들은 무리 지어 축구를 한다.


저녁이 오고 있다.

서쪽 하늘은 주황색이었지만 아직 하늘은 푸르렀다.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간, 한없이 정적이기만 한 그 시간,

가을 햇볕이 조금 남아있는 시간

완전히 낮이 아닌 시간

아직 밤이 아닌 시간

세상은 완벽한 어둠을 준비한다.


아내가 우리를 부른다.

야구방망이에 글러브 세 개를 끼워 어깨에 걸쳐 맨다. 쌍둥이 아들은 아내에게 달려간다. 아무렇지도 않은 별것 없는 일상이 소름 끼치도록 좋다. 삶은 이런 시간들로 채워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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