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일생은 무수한 슬픔과 고통으로 채색되면서도, 바로 그런 슬픔과 고통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받고 위로받는다. 슬픔 또한 풍요로움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희생한, 타인에 대한 한없는 배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결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꺼지지 않는 성화(聖火)이기 때문이다."
후지와라 신야(藤原新也) -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없는 게 많은 사람
"없는 게 많은 사람이에요"
"염치도 없고 매너도 없고 돈도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
달짝지근해라는 영화 개봉 인사에서 차인표 씨는 본인의 맡은 석호라는 인물에 대해서 소개한 내용이다.
차인표 씨가 맡은 극 중 인물 캐릭터가 순간 궁금 해졌다. 저런 사람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선입견, 아는 누군가의 이름들이 생각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 수만큼이나 독보적인 캐릭터들도 넘쳐난다. 그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가진 것을 정확히 알고 있을까? 없는 것과 있는 것의 구분과 차이를 명확하게 알고 있을까?
없는 게 많은 사람과 가진 게 많은 사람 가난한 사람, 가진 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형태 없는 것들의 없음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것의 부재를 숨길수는 없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형태 없는 것들의 특징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형태 있는 것들에 대한 없음에 대해서 민감해하고 소유하려 한다.
염치와 매너와 눈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윤활유 같은 것 이어서 만약 이런 것들이 없는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같은 모임 속에 섞여 있다면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성장기 무렵 나는 거의 많은 시간을 내게 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갇혀 지냈다. 뭐 지천명이 훌쩍 지나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도 인간이기에 이런저런 욕심을 내려 놓지 못하고 있지만 그 정도가 어렸을 적엔 분별이 없을 정도로 심했다.
"우리 집은 항상 가난했었고 "는 노래가사가 아닌 그냥 우리 집의 현실이었고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집 어느 것 하나 만족스롭지 못했지만 크게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아마 그런 없음을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이 메워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며칠 전 이사를 했다.
같은 단지에서 바로 옆동으로 가는 이사지만 비용은 거리에 상관없이 무게로 정해졌다. 매번 이용하는 이삿짐센터에 일을 맡겼다. 이사하는 날 비가 내렸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손발이 착착 맞았다. 무엇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해야 되는지 다들 대화 없이 일을 했다. 그 많은 짐들을 대화 없이 물 흐르듯 원래 위치로 가져다 놓았다. 너무 눈대중을 믿었던 탓일까 견적보다 짐이 더 많이 나왔다며 힘든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살림살이가 걷어지고 난 텅 빈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가진 게 너무 많구나!
살림살이가 이렇게 많았구나!
가끔 성당에서 신부님이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걸 보며 나는 왜 저런 재능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고 잘 다루는 악기가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지난달 사촌 형님이 아들 결혼식장에서 통기타를 메고 노래 부르는 모습도 나에겐 재능 없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뿐이랴
조기축구회를 사랑하는 팔십 대 아버님들과 달리기와 수영으로 건강관리를 꾸준히 하는 무라카미하루키 소설가, 하찮다고 느낄 수 있는 제품포장일을 천직으로 알고 땀 흘려 일하는 미얀마 외국인직원이 가진 일에 대한 마인드, 집 앞 재래시장 한쪽껸에 수북이 쌓인 박스들을 리어카에 차곡차곡 쌓으시는 할아버지의 움켜잡은 시간들ᆢ
나에게 없는 것들은 보통은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된다. 노래 잘 부르는 신부님이나 글 잘 쓰는 친구나 작은 일에 진심을 다하는 성당 봉사자들ᆢ 나에게 없는 것들은 아주 작은 것 에서부터 큰 것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런 없음을 마주칠 때마다 부러움 보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깨닫게 하는 것들은 나를 자라게 한다. 느끼게 하고 쓰게 하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없음 이래야 없는 게 많음으로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형태 없는 것들을 채우고
형태 있는 것들을 비우고 버리는 삶
없는 것들이 많아질 때래야 법정스님이 말씀하신 사물의 소유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래도 염치와 매너 눈치 이런 것들은 꼭 욕심내서 사치를 부르고 싶다.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재치를 번득일 필요도 없지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요 "
버지니아울프 [자기만의 방] P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