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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Apr 25. 2023

정신병원은 처음이죠?

기어코 내 손 위에 우울증 약이 올라왔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어 그래?


완벽하게 엉망진창이 돼버린 퇴원 첫날. 나와 썬은 카톡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했다. 그래봤자 '시발 존버' 라던지 '인생 처참' '우리에게 안식은 안정제와 억제대뿐'이라는 섬뜩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넋두리가 반이었지만 그래도 썬은 나보단 이성의 영역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또한 정보도 풍부했다. 급한 대로 집에 두고 왔지만 아빠의 일거수일투족이 걱정되어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일단 장기 요양등급을 신청해라. 주민센터에 가서 독거노인 케어 서비스라는 것을 등록하면 식사등을 챙겨주는 사람들이 나온다.라는 그녀의 조언을 받고 필요한 서류와 서식을 챙기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해두고 싶어서다.


이 즈음 썬의 멘탈 역시 바사삭 직전이었는데 기대했던 병원에서 2인실로 옮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전해 듣고 아예 퇴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아.. 우리의 계획이(-검증된 요양병원으로 아버지들을 입원시키는 계획-) 하나둘씩 삐딱선을 타고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병원에서 설득에 성공-> 바로 이천 ㄱ병원에 입원->모두의 평화였을 텐데... 설득도 실패고 병원도 실패했다. 처참한 결과에 계획을 전면 재수정해야 했고 "지금 알아둔 병원이 한 곳 있는데 가보고 괜찮으면 말해줄게."라는 썬의 말에 나는 그녀의 선행(先行)과 아빠의 포기 선언만을 기다려야 하는 무기력한 처지가 되었다. 내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아니 당장 내일은 어떤 하루가 펼쳐질까? 불안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들로 뒤척이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심정이 아침부터 명치께에서 올라왔다. 


'오늘 하루도 시작이구나.. 어서 아빠한테 가야 하는데..'


어제저녁 5시부터 끊긴 아빠의 연락이 신경 쓰인다. 빨리 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졌으나 역설적으로 격하게 가기 싫다.라는 마음도 반대편에서 쑥 올라온다. 팽팽한 양가감정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쿵쿵대는 심장박동을 누르며 향한 곳은 정신의학과였다. 처음부터 그곳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선 건 아니었다. 택시를 타면 중간에 '취소'를 누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아빠 코앞까지 데려다줄 것 같아서 최대한 멀리멀리 돌아갈 수 있는 교통수단을 고르며 걷다 보니 버스정류장 앞 정신과 건물까지 도달했던 것뿐이다.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문 앞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서 약을 좀 타먹고 싶어. 괜찮겠지?"

엄마는 향정신성 약품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조금만 견디면 너희 아빠도 포기하고 병원에 들어갈 텐데 그때까지만 좀 견뎌보지.. 정신과 약은 몸에 안 좋지 않니? 참을 수 있으면 참아봐.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고.. 감정을 약으로 조절한다는 게 엄마는 조금 걱정스러워.."


뭔가 이 상황을 철저한 관조자의 입장에서 말하는듯한 엄마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아빠의 상태가 나빠진 이래 엄마는 내 분노와 책망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엄마는 같은 슬픔을 가진 전우, 동지였으나, 동시에 책임자였고, 원흉이었고, 부채자였다. 특히나 엄마는 할 수 없고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을 대할 때 엄마가 보내주는 감정이나 위로 등은 강 건너 불구경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그런 감정이 들 때마다 엄마는 내 분노를 받아내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 아빠가 어쩌고 있는지나 알아? 안 서방한테는 어떻고!! 별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사람을 들들 볶아대는데 나보고 어떻게 견디라는 거야. 왜 참으라는 거야!!  당장 뒤질 거 같은데!!!"


'엄마가 와서 수발을 좀 들던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꺼내진 않았다.

예견된 거절에 역시나 실망하게 될 나 자신과 설사 엄마가 그 제안에 응한다 하더라도 절대 그렇게 하게 두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다. 그런데도 그냥 누군가가 나 대신 아빠를 책임져줄 테니 좀 쉬렴이라고 말해줬으면.. 하는 맘이 간절했다. 하지만 엄마는 결코 그런 식의 말을 꺼내진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정신과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정신과 약에 대한 효능과 부작용'보다는, 정신과를 갈 만큼 피폐해진 내 정신 상태에 대한 위로라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뭐, 내 속마음이 어쨌든 간에 엄마는 또 한 번 이유 없이 날벼락을 맞았고, 나는 못된 말을 실컷 퍼부은 후 병원으로 발로 옮겼다.







정신의학과에는 조금 애매한 시간대임에도 불구 꽤나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너무나 평범한 모습에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지는 기분이다. 오히려 그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은 쩌들 대로 쩌들어 누리끼리한 혈색에 퀭하게 들어간 눈과 볼. 아무렇게나 대충 걸친 옷과 빗질도 안 한 푸석한 머리를 모자로 푹 눌러 가린 피폐함의 극치인 나였다. 구석에 앉아 손톱에 낀 때를 틱틱 벗겨내며 30분여간을 기다렸을까. 내 순서가 왔다. 속을 꽉 막고 있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간별 순서대로 목차를  매겨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는데 이름이 호명되고 들어간 진료실에서 백발이 허옇게 서린 노의사를 마주하는 순간 모든 게 홀라당 섞여버렸다.


의사는 다소 차가운 표정으로 묵묵히 내가 내뱉는 엉망진창 이야기들을 타임라인별로 노트에 적어 내려가고 있다가

"쯧...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어 그래? 약 안 먹고는 버틸 수가 없었을 상황인데?"


하이라이트 즈음에 감상평을 툭 던져주었고, 그 감상평은 나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저요.... 진짜 너무 힘들어요. 어흑.. 엉엉엉....."


얼굴의 혈관들이 쫙 쪼이는 기분이 들며, 열이 훅 오르는 순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힘들었지. 어떻게 견뎠니.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주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렇지. 나 약 안 먹고는 버틸 수 없었던 거 맞지.

내가 못 견디고 정신과에 온 게, 아빠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못 건네주는 게 내가 못 돼먹은 아이가 아니라서.

내 정신력이 약해빠져서 그런 게 아닌 거지?  지금 이 상황은 누구라도 견디기 힘들 상황인 게 맞는 거지?


의사가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순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자학했던 것들이 비로소 시원하게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의사는 "아빠는 요양병원에 보내세요. 그리고 너는 약을 먹으세요"라는 명쾌한 결론을 처방전과 함께 내려줬고 10분 남짓한 진료가 그렇게 종료되었다.



핑크색 하트 모양의 우울증 약 / 부정맥에 쓰이는 심장약 / 수면제 / 그리고 항불안제

알록달록 네다섯 개의 알약들이 담긴 약 봉투를 품에 안고 나니, 말이 씨가 됐네.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 쿡쿡 웃었다.




과거에서 온 소포



이야기는 조금 더 과거에서부터 시작된다.

결혼 후 1년이 지난 시점부터 아빠는 본격적으로 나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을, 우리 부부의 관심과 애정으로 등가교환하길 원했다. 요약하자면 혼자 살기 적적하고 우울하니 우리 부부를 달달 볶아댔다는 뜻이다.

단순 노인성 우울증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 느꼈던 건 당시에 키우던 고양이가 많이 아파 안부전화며 뭐며 신경을 못쓰자 아빠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그 때문에 나는 신경쇠약 직전이었다.


그런 우리 둘 사이에서 늘 중립적 입장을 고수했던 남편도 이번에는 "아버님 좀 심하시긴 하네, 아무리 서운하셔도 그렇지. 딸이 오래 키우던 고양이가 다 죽어가는데 자기한테 신경 못써준다고 저렇게 화 내시는 게 이해가 잘 안 가"라는 생각이었고 그것이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받아줄 수는 없다 생각하는 와중 아빠가 엄마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는 사건이 터진다.

엄마는 내가 아빠에게 들들 볶인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으나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기에 같이 아빠 뒷담(?)을 해주는 걸로 나를 토닥여주곤 했다. 그러던중 외갓집 식구들에게 줄 옷을 한 보따리 챙겼다며 아빠가 뜬금없이 우리 둘을 집으로 호출했는데 옷 가게를 하는 아빠가 어떤 옷을 주려고 하나 싶어, 딴에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온 엄마는 아빠가 챙겨놓은 옷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땡처리 가게에서나 팔아도 안 팔릴, 나이대와 성별을 가늠하기 힘든 애매한 스타일의 옷들이 봉투에서 줄줄 나왔다. 보는 내가 화끈할 지경인데 아빠는 그야말로 당당했고 -나는 오래전 도망간 마누라에게 이 정도의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식의 태도를 내내 고수하며 "그래도 김밥 집에서 김밥이나 마는 너보다는 내가 더 낫지 않느냐"라는 말로 엄마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참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하며 말도 섞지 않고 돌아섰을 엄마지만 지금은 다르다. 서울을 떠나 고향땅에 정착한 지 20년. 아빠 말마따라 김밥도 말고 설거지도 하며 시골텃세 +@ 를 모두 겪은 엄마는 더 이상 예전의 엄마가 아니었고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의 향연을 듣지 않겠노라 강한 거부의 의사를 표명했다.


"지금 뭔 헛소리를 하는 거예욧!?"


그날은... 솔직히 아빠가 심하긴 했다. 내가 봐도 옷들은 너무 엉망이었고 하루에 만 원도 못 파는 옷 가게를 유지한답시고 따박따박 생활비를 받아 가겟세로 날려버리는 아빠보단 혼자서 벌어먹고 살아보겠다며 김밥 집에 출근하는 엄마가 내 입장에선 훨씬 나았으니 그걸 아는 엄마는 이때다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팝콘을 와작거리는 심정으로 흥미진진하게 엄마의 공격을 응원했다. 그녀의 울분 섞인 외침 속엔 '당신이 결혼한 딸내미를 너무 들들 볶는 바람에 애가 우울증이 와서 약을 먹는다더라!' 하는 약간의 조미료가 가미된 공격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예상치 못한 극딜에 적잖이 당혹한 아빠는 내가 우울증이 왔다는 소리에 덜컥 겁을 먹어버리고 만다.

이날 아빠가 굳이 왜 엄마를 불러내어 쓸데없이 면박을 당했는지는 미스터리다. 연락 한통 하고 살지 않던 외갓집 식구들에게 잘 보일 이유도 없을 것이고. 추측해 보자면 나의 분가 후 혼자가 되어 버린 본인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는지도 모른다.


그 후 몇 년간 우울증은 나의 무기가 되었다.


아빠는 내(가짜) 우울증에 겁을 먹어 들들 볶는 횟수가 적어졌고, 그에 비해 내 행복도는 점점 올라갔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아빠가 선을 넘는다고 생각될 땐 "아빠. 나 우울증이 좀 심해진 거 같아.."라는 둥 적절한 겁을 줘가며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간 지 5년 차의 겨울. 기어코 내 손 위에는 우울증 약이 올라왔다.


애초에 예견되어 있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알록달록 장난감같이 예쁘게 빛나는 핑크색의 우울증 약은 마치 과거에서 출발한 착불 소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오래전부터 내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충 가방에 약을 쑤셔 넣은 후 오랜 우울의 근원을 마주하기 위해 택시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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