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다.
준호도 마찬가지였다.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워질 때마다 추억이 깃든 공간을 찾아가 아이처럼 오랫동안 울다가 돌아온다. 어린 시절에 엄마를 잃은 준호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옅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그리움에 목놓아 한참을 울고 나면 신기하게도 힘이 났다. 가끔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돌아오는 그를, 수현은 모른 척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날도 한참을 울다 집으로 귀가하던 길이었다.
"아빠!"
준호를 발견한 이나가 달려가 아빠에게 팔짱을 꼈다.
"우리 딸, 오늘도 수고했어."
준호가 이나에게 괴상한 표정으로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 이나는 그런 아빠의 유쾌함과 다정함이 좋았다. 하하 호호 웃으며 걸어가는데, 저 앞에 걸어가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준호가 할아버지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호흡을 하는지 확인했다. 위급 상황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가슴을 압박하며 심폐소생술을 진행했다. 이나는 119를 불렀다. 다행히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휴대폰으로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아무도 받질 않았다. 일단 준호가 함께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기로 했다.
몇 가지 검사를 진행한 뒤 의사가 찾아와서 물었다.
"어르신, 최근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친 적이 있으시죠?"
"..."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검사 결과, 뇌좌상이 발견됐어요. 어떻게 다치신 건지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
의사의 계속된 물음에도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사가 준호를 복도로 불러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뇌 손상뿐 아니라 몸 곳곳에서 폭행의 흔적이 발견됐어요. 요즘 이렇게 맞아서 병원에 오는 어르신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한 것이 분명한데 저렇게 계속 입을 안 열고 계시네요. 간호사가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해보니 바쁘니까 자꾸 전화하지 말라며 욕설을 퍼붓고 끊었답니다."
그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려던 찰나.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밖으로 나왔다.
"아직 안 됩니다. 회복될 때까지 입원해 계셔야 해요."
"됐다 이눔아!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저리 비키기나 혀!"
막무가내다. 그는 의사를 밀치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불안했던 준호는 어르신 혼자 보낼 수 없이 뒤를 따라갔다. 어르신의 집은 이나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주택 안으로 올라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밤산책을 나선 준호와 이나.
어디선가 고요를 깨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였다. 어르신의 집이다. 준호는 걱정이 되는 마음에 며칠 동안 밤운동을 나올 때마다 할아버지의 집 근처를 맴돌았다.
쾅쾅쾅. 문을 세게 두드렸다.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아이씨 누구야."
눈이 풀리고 발음이 꼬여 있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안에 어르신 계시죠?"
"누구냐니까."
남자가 준호를 밀치며 말했다. 말할 것도 없이 준호는 전혀 끄떡도 없었다. 오히려 남자는 아직 건들지도 않았는데 혼자 비틀거리며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남자가 욕설을 하며 쫓아가려고 했지만 제발에 걸려 넘어졌다. 안방에 할아버지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바닥은 깨진 도자기의 조각들로 가득했다. 이나는 재희에게 연락했다.
50대 남성은 경찰서로 끌려갔고, 어르신은 병원으로 옮겨졌다. 몇 시간의 수술 끝에 깨어난 할아버지는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자신의 아들 때문에 죽을 뻔했으면서도, 끝까지 아들을 보호하며 버텼다. 이미 경찰 조서와 이웃집의 증언을 통해 어르신의 아들이 알코올중독에 도박중독인 사실과 어르신을 자주 폭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말이다.
"너희들이 뭘 알아!"
증거와 증언이 쏟아지는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노발대발하며 자신의 아들은 죄가 없다고 소리쳤다.
한참 소란을 피우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런 줄 알았다. 잠이든 줄 알고 준호와 이나는 잠시 병원 밖으로 나가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병실에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 밤중에 할아버지 혼자서 어딜 가셨단 말인가.
병원 곳곳을 샅샅이 찾아보지만 할아버지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때마침 병원을 찾은 재희와 함께 병원 CCTV를 확인하러 갔다.
"엇.. 잠시만요. 저기 보이는 사람 아니야?"
이나가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맞는 것 같아."
할아버지가 옥상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옥상으로 올라온 이나는 너무 놀랐다. 난간 위에 할아버지가 위태롭게 서 있는 게 아닌가.
"어르신! 위험해요 당장 내려오세요!"
준호의 다급한 외침에 슬쩍 뒤를 돌아보는 듯했지만 표정이 없다. 이미 모든 걸 체념한 듯한 사람의 얼굴 같았다.
"가까이 올 생각 말어. 그랬다간 바로 뛰어내릴 테니."
힘 없이 툭 내뱉더니 잠시 후 이어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삶에 미련 따위 없어. 80 넘게 살면서 하고 싶은 거 원 없이 다 해봤거든. 바람도 여러 번 피우고. 아내와 아들에게 폭력도 서슴없이 가했지. 그 바람에 아내는 아들도 버리고 도망갔어. 그때부터 아들놈은 나를 원망하면서 살았어. 때론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기로 결심한 놈처럼 보였지. 그게 나에 대한 복수로 생각했을 거야. 그랬다면 성공했어. 결혼도 안 하고 일도 안 하고 술과 도박에만 미쳐 사는 놈을 보면서 가슴이 옥죄어 오더라고. 내가 죄인이야. 내가 죽어야 내 아들이 살아."
이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아들을 구하는 방법일까.
바로 그때.
할아버지의 몸이 아래쪽으로 기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