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야!!!"
밤운동을 하던 이나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른 달려갔다. 근방에서 제일 오래된 아파트였다. 불이 났다는 말에 아파트 주민들이 대피하던 중이었다. 불이 난 5층 집만 빼고.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두 아이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뒤에서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두 아이를 불길 속으로 데리고 가려는 게 아닌가.
"엄마 제발! 우린 살고 싶어! 죽기 싫다고!"
아이들이 울면서 엄마를 밀어내고 있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어떤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거는데 말이다. 불길이 빠르게 거세지고 있었다. 당장 1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이한과 이나가 고민도 하지 않고 베란다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우와. 탄성이 들렸다. 아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이들의 눈이 커졌고 입은 벌어졌다. 마치 스파이더맨을 실제로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먼저 도착한 이한은 베란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에게서 아이들을 떼어 냈고, 이어서 도착한 이나가 8살 여자아이를 안아서 먼저 내려갔다.
"이모 꽉 잡아!"
여자아이는 죽을힘을 다해 이나의 목을 꽉 부여잡았다.
이한이 아이들의 엄마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했고 10살 남자아이를 먼저 구출시키려 했다. 내려가기 직전, "안 돼!" 하고 외치더니 여자가 아이의 뒷자락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아찔했다. 하마터면 아이를 놓칠 뻔했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아슬아슬한 상황에 소리를 질렀다. 다시 정신줄을 부여잡고 여자의 손을 뿌리친 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둘 다 2층에서 아이를 꽉 안은 채 점프를 뛰어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지금 자신들이 본 장면이 영화였는지 현실이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지 않을까 싶다.
이한이 다시 올라가려던 그때.
아이들의 엄마가 베란다에서 떨어지려고 거꾸로 매달렸다.
"어어어, 떨어져 죽으려나 봐!!"
사람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부모들은 아이의 눈을 가려주었다. 무사히 내려온 두 아이는 엄마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팍. 소리가 들렸다. 죽었을까?
사람들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살았어."
누군가의 말에 눈을 떠 보니 도혁의 품에 여자가 안겨 있었다. 왜소한 체형이었다고 하더라도 5층에서 떨어진다면 무게감이 어마어마했을 텐데. 도혁은 끄떡도 없었다.
그와 동시에 119가 도착했다. 경찰과 함께.
그들은 일사천리로 움직이며 불길과 상황을 빠르게 진압해 갔다. 여자는 아까부터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왜 살려 냈냐고. 원망의 말을 쏟아내면서 말이다. 아이들도 엄마의 곁에서 같이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모두 안쓰러운 눈으로 지켜보며 서 있었다.
수현이 다가가 여자와 아이들을 안아주고 토닥여주었다. 괜찮다고, 이제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면서.
일부 주민들은 그들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여자가 아이들과 함께 죽으려고 불을 낸 거라고 짐작도 하고 있었다. 3년 전에 아이들의 아빠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 혼자 돈을 벌어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6개월 전인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만 박혀 있었다. 직장에서 상사를 꼬셨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심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점차 피폐해져 갔다. 진실은 상사가 그녀를 성폭행했고, 상사의 아내가 회사 내부에 나쁜 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부추긴 건데 말이다. 진실은 그녀가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정말 몰랐을까. 그녀가 피해자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결국 아이들의 엄마는 몸도 정신도 망가져 갔다.
월세도 밀려갔고, 밥도 해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 굶고 있는 아이들이 딱해서 먹을 것을 조금씩 가져다주는 주민들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들 역시 형편이 좋지 않았으므로. 이 아파트에 살면서 세 모녀를 챙겨줄 여유가 있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주민들에게서 이러한 사정을 전해 들은 준호는,
집에 가자마자 가족회의부터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희를 발견한 이나는 반가움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마친 재희가 이나에게 다가왔다.
"대강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히어로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네? 아, 네."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했다.
"경찰인 저보다 훨씬 훌륭하고 멋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이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칭찬을 들어서가 아니라. 치명적인 재희의 눈웃음 공격에.
"이나야 가자."
준호가 불렀다. 다 같이 병원으로 이동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나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상황이 상황인 지라. 지금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매불망 그와 마주치길 기다렸으나 이런 순간이 아니면 만나질 못 했다.
"같이 밥 먹을래요?"
머뭇거리던 그녀가 드디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좋아요."
재희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잠시 머물렀지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도 그녀가 내내 궁금했고 보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