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정신 병원에 입원한 후 나는 병들었습니다. 엄마가 건장한 남자 보호사들의 완력에 의해 두껍고 육중한 철문 안으로 들어간 후 내 시계는 멈춰버렸고. 감정이 무딘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우울한 날이 많아졌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 때면 병원 마당에 하늘하늘 떨어지던 꽃잎이 떠오릅니다. 억겁의 무게로 나를 짓누르던 가벼운 벚꽃잎이요. 슬펐습니다. 제발 엄마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멀쩡하다가도 순식간에 우울함이 몰려왔습니다. 병문안 가기로 한 날짜가 다가오면 째깍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본인 생일날이면 1년에 딱 한번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에 우울해졌던 드라마 주인공처럼 말이죠.
매주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병문안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뜻한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두렵고, 만나도 할 말을 찾지 못해 답답했습니다.
“왜 당신은 먼저 엄마 문병 가자는 소리 안 해?”
“당신이 힘들어하니까”
“맞아 그러니까 당신이 나 좀 억지로 데려가면 좋잖아.”
성격이 유한 남편에게 괜히 화를 냅니다. 한 번은 병문안 가는 내내 싸우다가 차에서 내렸습니다. 낯선 터미널 대기실 의자에 앉았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서성였습니다. 광대처럼 끼를 부리던 나를 어딘가 두고 왔고 애교 많은 딸로 다시는 돌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엄마를 언제까지 입원시켜 놓을 것이냐는 질문도 나를 괴롭혔습니다. 작고 허름하더라도 집을 하나 구하면 엄마를 모시고 올 수 있을까. 아이들은 남편 혼자서 돌볼 수 있을까. 내가 과연 혼자 엄마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수없이 자문했습니다. 바보처럼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고요. 그래서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고 퇴원시켜 함께 살 자신이 없었거든요. 지켜봐야 할 땐 겁 없이 용기 내더니 용기가 필요한 순간엔 정작 숨고 핑계만 댔습니다.
의사와 충분히 상의했다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집이 좁고 아이가 어리고 나 혼자 감당해야 하고. 이런 이유와 환경을 핑계로 멈춰 있었고 기대도 희망도 없으니 화만 냈습니다. 그렇게 미루고 상황을 회피했습니다.
돌아보면 환경 탓만은 아니었습니다. 전부 마음 탓이었습니다. 그럴듯하게 괜찮은 사람 흉내를 냈지만 과거를 소화하지 못한 사람이라서, 어른이 되고도 여전히 아이라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였습니다. 무엇보다 도움을 청하는 일에 서툴고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현실감각이 부족했거든요. 그래서 엄마를 돌볼 수 없었던 겁니다.
5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행사도 많고 엄마와 딸아이 생일도 오월이거든요. 병문안을 차일피일 미루며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기운조차 없는 날들의 연속이고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걸 바라보았습니다. 25일은 딸아이 생일이거든요.
몇 주 전부터 딸 아인 파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손가락 열 개를 쫙 펼쳐 보여주면서 씽긋 웃었죠.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깜빡였습니다. 힘을 내 보았습니다.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도 딸은 내가 필요하니까요.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 뭔가를 하면 나아질까 생각했거든요. 내가 일상을 회복하고 우울을 극복해야 나와 내 자녀는 살릴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람들은 종종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합니다. 물에 빠진 두 사람 중 누구를 건질 거냐고. 남편은 아이보다 나를 건질 거라고 말해줬지만, 나는 아이를 건질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곤란한 상황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엄마와 내가 함께 물에 빠진 것 같은 상황에는 나를 건졌습니다.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그렇다고 건지지 못한 사람이 죽기를 바라거나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요.
빨간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하얀 식탁보를 깔고 화려한 색상이 돋보이는 반짝이가 들어간 풍선을 매달았습니다. ‘축하’ 문구가 적힌 가랜드를 벽에 늘어뜨리고 밝게 불을 밝혔습니다. 케이준 치킨 샐러드는 직접 만들고 피자와 음료도 시켰습니다. 케이크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로 사 왔고요. 김밥과 떡볶이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도 받았는데 끝내 다 해내지 못했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손이 무겁고 주방에 오래 서 있는 것도 어려웠거든요.
나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뭔가 따지고 묻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냐고 원망하며 떼를 쓰지 않았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행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요. 교회 찬양 대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봉사도 했고 아무것도 멈추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다만 나를 도왔습니다. 뭔가 달라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요.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오래 곱씹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봅니다. 다 이해한다고, 괜찮다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각자의 몫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고 잘해보려고 노력했으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생각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라고.
연약했던 나를 가만히 안아줍니다. 힘이 약해서 놓쳤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니까요. 엄마도 내가 평생 죄책감 느끼며 살길 바라진 않으실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