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내가 살아온 평생을 비웃듯 처음 경험해 보는 기시감이 내게 미소 짓는 것이 벌써 네 번을 넘겼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현재 밟고 있는 좌표 위에서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몸을 최대한 웅크려 말고 내 상황과 주변의 상관성을 아마, 인생 최대로 분석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체감만인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의미 없는 행동이라 여겨지는 짓을 행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하루가 지난 후 세기도 힘들 정도로 일탈적 행동을 반복했다.
그런 짓을 반복하고 시간이 꽤 흘렀다 느껴
비일상도 질려갈 때쯤
이대로 괜히 에너지만 낭비하다간 제 풀에 죽지 않을까 하여 생존을 이어 준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공포가 엄습하기에 '무기'를
내 외로운 배를 채워줄 '음식'을
내 보잘것없는 몸을 보완해 줄 각종 유용한 '도구'를
마지막으론 마지막 희망 '핸드폰'을 신중하게 주머니에 넣었다.
인스턴트의 불안감이 날 한 차례 휩쓸고 나니 이내 약간의 안정이 찾아왔고
이내 눈 닿는 곳이란 곳마다 발을 옮겨 내 본심대로 보이는 모든 것에 손길을 스쳤다.
그 마음은 호기심 이라기보단 탐구심에 가까운 본성이라는 점이 날 더욱 재빠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가까운 세상에서도 난 이토록 새롭게 살 수 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애초부터 얕았던 공포가 한 층 깎여나갔을 때쯤
난 너무나도 지쳐서 이내 처음처럼 털썩 주저앉기에 이르렀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내 인지 속에서만 존재하는 클리셰처럼 누군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없었고
다른 어떤 것 보다도 오랜만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할 수 있을 만한 나조차 이유 모를 감정이 내 안에서 찰랑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몸을 멈추니 대뜸 머리가 기동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지쳐 쉬고 있는 내 몸에 뇌가 의문을 던졌다.
첫 번째. 시간은 물질적으로 실존하는 개념이 아니다.
두 번째. 시간은 앞으로만 가지 않는다.
세 번째. 각자가 가지는 시간은 다르다.
처음 난 이것을 환각이라 생각하였고 언젠가 다시 현실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지만
고요가 주는 공포를 한 차례, 두 차례, 수십 차례 맛보고 나니
이 상황은 이내 불멸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바꿨다.
그런데 지금 내 몸이 떨리는 이유는 뭘까. 하고 내가 나에게 질문을 해 보니 금방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으니.
시간이 멈췄다는 것은 내가 어떤 것에도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시간이라는 것은 결국 관측되는 주기이다.
그게 정지했다는 것은 당연히 공간 자체가 정지해서 불변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일진대
어째서 내가 밀면 밀리고 던지면 던져질까?
그때부터 조금씩 모든 요소가 거북해졌다.
시간이 멈춰서 나 혼자 어떤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라면
멈춘 공간을 내 물리력으로 바꾸지 못할 텐데
손으로 밀치자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물체들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한 나는 미친 듯이, 아니 미쳐 버려서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다는 마음만이 가득 차올랐다.
내 자그만 뇌 용량을 뒤져 봤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시간이라는 무답의 개념만이 맴돌았고
그 외의 가능성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온몸에 돋아나는 희멀건 공포 때문에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멈춰있는 주변이 내게 해답을 주지 않으려 하니
유일하게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두 다리와 눈에 의존하여선
아마 이 세상에 내 심장 외에 존재하지 않을 맥박 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마 그때쯤부터였을 거라 생각한다.
조용히 울리지만 거대하게 느껴지는 내 심장 소리로 시곗바늘의 째깍거림을 대신하게 된 시점이.
그렇게 나 혼자 째깍였다. 오른쪽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한 채로
제자리에서 꿈틀대는 고장 난 시곗바늘처럼.
태양조차 꼼짝하지 않아 내가 태양으로부터 도망치기에 이르렀을 때쯤 이 행성이 '넌 혼자'라고 읊조렸다.
지치도록 내리쬐는 저 햇볕과 날 동시에 씹어 삼키려 하는 이 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빛이 날 잠들지 못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온몸이 체감하는 지금 햇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헤매고 또 헤매봐도 싯누런 빛이 여전히 지평선 너머의 모든 곳을 물들이고 있었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생각해라.
온기도, 생기도 없는 저 태양에서 날 가려줄 곳을 지금 당장 떠올려야 했다.
번뜩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주던 도피처가 떠올랐을 때 지금까지의 발걸음을 다시 번복하였다. 어쩌면 지나온 곳에 해답이 있는 것일까? 하고.
내가 살던 집의 위치를 머릿속에서 쥐어짜내
겨우겨우 목적지의 앞에 당도한 나는 남은 힘으로 잠금장치를 부순 후 조금의 소리조차 내지 않고 부드럽게 열리는 문에 눈을 찌푸리며 집 안 깊숙이 파고들기 위해 커튼을 있는 대로 쳐서 모든 해답을 찾기 전 일단 두 눈의 비명을 멈춰줄 생각이었으나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 사실이 날 비추었다.
"이곳도 밝았다" 끔찍이도 선명한 거실의 전등을 켜고 그대로 집을 나온 것이 기억이 났다.
일순간 머리가 멍해짐과 동시에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손에 닿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져 형광등을 완전히 박살 냈으나 창백한 빛이 조금도 걷히지 않는 것을 보곤 갈라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대문을 박차고 뛰쳐나와 버렸다.
끝이야. 이젠 아무 데도 없다.
인공적으로 설계된 내장처럼 느껴지는 수많은 건물들에 내 집이 포함되었으니 이제 어디에서 안식을 찾아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난 마지막 남은 일선을 놓아버렸다.
주변의 사람들이 미치도록 거슬렸다.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하고 불행하고 바쁘고도 침착하게 살아가고 있는 저 모습들이
날 더욱 미치게 했다.
아예 눈이 돌아버린 나는 그런 마네킹들에게 장신구를 꽂기시작했다.
찌르고 뽑고 휘두르고 베어내고 짓누르고.. 그럼에도 피 한 방울 넘쳐 나오지 않는 균열을 보며 오랜만에 웃었다.
그 웃음에서 비롯된 찰나의 도파민이 다행히도 조금씩 내 틈을 메워줬다.
'정신을 고쳐 잡아라'
여전히 작동하는 내 세포가 깊은 곳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 어둠에 익숙해지지 못해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뻐근한 뒷목을 응시하며 답변했다.
알았어. 걸으면 되는 거지?
정신을 잃은 후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몸의 비명을 보아하니 꽤 '시간'이 지난 것은 분명했다. 이내 놀랍도록 차분해진 내 정신을 조금 상기시키고 또 걸음을 이어 나가기로 하였고 그렇게 또 연명하고 말았다.
이제 내가 취할 행동은 단 하나. 가증스러운 나침반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살다살다 나침반이란 물건이 붙박여 있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니..
내가 직접 나침반을 들고 움직인다면
멈춰있는 세상의 방향을 정확히 잡아내던 나침반은 존재 의의를 잃는다.
아무렴 지도 따위보다야 좋겠지. 디지털 지도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돌멩이와 같았고
아날로그의 지도는 보자마자 신물이 올라오는 체질이니
새삼 아둔의 끝을 달리는 나의 안이함으로 인해 속이 뒤집혔다.
아무튼간에 이 세상에서의 방향타가 가진 특질을 상기시키며
아웃도어 매장의 안쪽에 있는 나침이 가리킨 방위에 답을 받아내 발걸음의 목적지를 가변하기에 이르렀으니 어떤 뚜렷한 목표를 얻게 된 나는 이미 곳곳에 묻어있는 빛을 인정해 주었다.
그 이후로는 나름대로 희망차게 걸어보려 애썼다.
버릇처럼 챙긴 나침을 쓱 보고 나선
신경질적으로 깨부수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보니 잊고 있던 이 세상의 섭리가 떠올랐다.
지금부터 할 것은 하잘것없는 여행 따위를 떠나는 게 아니었고 그렇기에 중요한 건 가는 곳이 가진 형태.
첫 번째론 지구가 둥그스름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을 곱씹었으며 두 번째론 지구에 생태라는 게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내 사고력이 이 정도로 노력해 주는데 일단 무엇이든 될 거라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긴 발걸음이 예상되오니 부디 배를 채울 것을 추천드린다고일찍이 고장 났다고 생각한
생존본능의 회로가 움찔댔다.
눈과 얼음을 보고 싶으면 그때는 북국으로, 비라도 보고 싶을 땐 짙어지는 구름을 따라서 착실하게 걸었다.
어둡고도 인기척 없이 한산한 곳에서 휴식을 취할 마음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서쪽으로 발을 뗀다.
마음속에 곰팡이가 피려 할 때마다 마네킹에게 머리핀을 꽂아주니 그럭저럭 뒤숭숭한 기분도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시 자연광을 맞이하러 너덜거리는 하체를 질질 끌기 시작하기를 이 풍경화 위에서 나만이 홀로 낡아가는 것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서서히 깎여나가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함에도 내가 나를 끝장내지 못하는 이유는 이성이 주는 태곳적인 두려움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정지한 미생물이 내 몸을 썩히지도 않아 멈춘 시취가 멈춘 세계와 분리되어 영혼마저도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았고 그렇게 될 미래가 보일 수밖에 없게 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니
이런 식의 비관적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버리고야 말았다.
머리를 환기시키려 노력하자
필름을 되감듯 여러 기억들이 한 차례 머릿속을 긁고 지나가니 움직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그 자리에 남겨져 있는 더 이상 나와 함께하지 않는 내 그림자를 끝으로 의미 없는 회상에 마침표를 찍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땅과 하늘이 내 그림자마저 하다못해 전능한 신조차도 내가 죽었다는 것을 나 몰라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걸어가야겠지.
이 대지 위의 어딘가는 나처럼 흘러가는 곳이 있다는 희망의 초라한 건전지 하나뿐의 동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