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리고 쓸릴수록 굳어지는 살의 표면이란 아름답다.
검이란 힘을 휘두르고자 마음먹었던 미지근한 그날을 떠올렸다.
그 날선 악의를 향할 뚜렷한 대상조차 부여되지 않은 불투명한 상황에서 쌓여가는 굳은살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되짚어봐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고
조용히 키워가는 몸집에 비해 내 아집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몰라 갈팡질팡하는 순간에도
왼손의 마디엔 진중한 확고함의 신념을 담고 있었고
오른손의 마디엔 실패의 두려움과 미숙함에 대한 불신이 담겨있었다.
그 후로 몇 년이나 흘러 일종의 확신이 생기니 평안한 나날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어 영원히 검을 휘두를 날이 없게 된다면 그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굳혀갔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먼 타지에서부터 시작된 침략의 고동이
벌써 우리의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음을 나는 묻어두고 싶었다.
침략자들의 척후가 이곳에 뿌리내린 우리들을 우연찮게 찾아냈을 때 나는 수행해 오던 나날의 악의를 그들에게 향했다.
처음 느껴본 고기를 쪼개낸 감각.
베었다고 단언하기엔
스스로도 웃음이 나오는 절(絶) 음과
강직한 뼈를 갈라내지 못해 이제 막 빛을 본 도신의 날이 볼품없이 빠져버렸고.
생생히 보이는 단면의 불안정한 뒤틀림이 내 볼을 화끈거리게 했지만
내심 상상했던 결과에 기대감이 상충되어 이내 떨리는 감정이 켜켜이 가라앉았다.
사람의 단면은 나무도막과는 다르다.
깔끔하게 죽어버리지 못한 저 이의 고통스러운 얼굴은
이 오른손의 망설임이 말해주는 결과였을까?
그럼에도 동공이 커지는 것은.
조금 벌어져버린 입은.
왼손에 깊이 울리는 진검의 감각에 반응해 버렸다고 앞서서 인정해 버렸다.
이것을 위하여 실력을 기르고 단련을 한 건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검집에서 검을 빼어든 내 악의를 봉하고자
나는 이 이후로 검이란 살인기(殺人器)를 검집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단순히 살육을 위해 악의적이게 설계된 도구를 보호하는 행위에 신물마저 올라오고 말았으니까.
하나 그런 점들에 대해 누구도 쉬이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서툴더라도 시작은 시작.
결단이 가지는 의미는 어떤 직선보다 곧게 세워질 초석의 증거와도 같으니
이에 비칠 후일이 기대되게 하기에 충분했다.
샘솟아버린 선의에 빛난 도신 그 자체가 나의 여명이자 절멸할 명.
그 명줄의 말로가 보이기라도 하시는 듯 시신들의 뒷수습을 끝낸 스승님이자 내 아내가 여느 때와는 달리 내 쪽으로 몸도 돌리지 않았다.
그 뒷모습에서 많은 감정들이 묻어 나와 나 또한 묵묵히 주위의 핏자국을 지워나갔다.
다행히 어디에나 널려있는 민가라 생각한 척후들이 우리의 삶의 흔적을 보고 본진으로 사람을 보내지는 않은 모양이니 남은 흔적들을 서둘러가며 지우지는 않아도 되었다.
시취를 지우며 나는 절망했다.
이 이후로 도망치듯이 도착하는 곳들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과 연이 스칠지 감조차 잡지 못하겠다.
누굴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내가 과연 몇 번의 검흔을 긋게 될까?
사람을 죽인다는 감각이 이리도 거북한 것이라면 감히 쥐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무예를 기르면 단지 그것으로 전부일 줄만 알았던 칼잡이가 되어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기를 다루는 자들 모두가 이런 생각으로 휘두르는 것일까?
다들 무언가를 지키고 싶어서, 살아남고 싶어서, 증명하고 싶어서, 빼앗고 싶어서 그렇게 휘두르는 건가?
어지러이 섞여있는 각자만의 이유들 사이에서
내게 정답이 되어줄 길이 무엇인지 나는 하루빨리 정해야만 한다.
도대체 무구란 내게 무엇일까. 찬탈하기 위한 힘인가.
그것도 아니면 세상을 밝게 할 힘인가.
악의를 휘두르기 전에 목표를 명확히 해야만 하였다.
그날 이후부터 생각을 끊이지 않고 이어나갔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역시 무기는 무기 그 자체로 억제력이 되는 면이 있다.
이성적 생물인 이상 푸른 도신에 피가 배어있는 모습을 멀리하게 될 테니 더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검집이란 내게 있어 더욱이 필요 없는 도구일 것이다.
육식동물이 배가 불러서 숨기던 송곳니를 드러낼 때가 있듯이
타인을 해하지 않기 위해 비정한 검날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 정도의 편법으로 어떻게든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그렇게 마음먹은 후로 나는 물 한방울조차 감히 내 검에 닿지 못하게 하였다.
썩은자만이 구분하는 사람피와 동물피의 비릿한 향의 농도차이로 이에 감응하는 이들만을 베기위해
동물의 피로 검이 녹슬때까지 담금질 하였으니 이 검을 씻지 않는 의미와 다시는 씻겨지지 않는 나의 족적도
이 검과 명을 달리하지 않으리라.
무엇을 하던 시기인지 희미하기만 한 이 시점을 나는 이 살인기를 봉한 의미를 다시금 쓰게 되었던 전환기라고. 먼 훗날 다시금 정의내렸다
이렇게 꿈틀거린다고 해도 광명이 내게 오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미숙한 아빠로서 아들에게 다양한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라 살아가는 것이다.
내 발치에 있는 이 피붙이의 눈이 언제나처럼 빛나게만 할 수 있다면
내일이 밝은 후에 아무렇지 않게 붉게 녹슨 검을 다시금 풀칠한 지팡이에 집어넣고 다니게 될 것만 같아 덜덜 떨리는 내 손 위로 또 다른 손이 포개어졌다.
미약하게 전달되는 체온으로나마 약간의 위로를 전달받아 덕분에 비관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해가 일어서는 대로 또 다른 곳들로 가는 수밖에.
하지만 그전에 아들에게 바라는 점이 딱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을 모든 것이 잠들어가는 밤에 아내와 얘기하며 쉽게 감기지 않는 눈을 달랬다.
언젠가 차가워져 버릴 내 몸에서 이미 너무나 멀리 떨어져 버려서 나와는 다른 마음을 지닐 꼬마가 훗날 이런 마음을 품어주면 좋겠다.
"사람이란 도대체 어떻게 커 가는 것일까?"라고.
그림-Andre Cos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