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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Oct 20. 2022

통 통 통

    

<사물의 이름이란 그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면 굳이 묻지 않더라도 절로 알게 되는 법이다. 나는 내 피부로 들었다. 멍하니 물상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 물상의 언어가 내 피부를 간지럽힌다. 예를 들면, 엉겅퀴. 나쁜 이름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여러 번 들어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름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

 다자이 오사무 <완구>     


사물의 이름은 아니지만 가끔 멍하니 있으면 내 마음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다.

‘탕탕탕’

어찌 된 일인지 잊을 만하면 가끔씩 ‘탕탕탕’이 떠오른다. 사실 처음 알게 된 소리는 ‘쾅쾅쾅’이다. 수년 전에 우연히 이문열 작가가 주제별로 선별하여 묶은 세계명작 산책을 읽게 되었다. 총 열 권에 각 권마다 열 편 정도의 단편이 실려 있으니 총 백여 편에 가까운 다소 많은 양의 단편들인데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쥐고 흔들어 놓은 단편을 꼽으라면 다자이 오사무의 <쾅쾅쾅>을 꼽는다. 글 속 화자가 결정적인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환청처럼 들리는 소리가 ‘쾅쾅쾅’이다. 책을 읽고 난 그 이후부터 나의 마음속에도 ‘쾅쾅쾅’ 두드리는 울림이 있었다. 글 속 화자처럼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울림이 있는 게 아니라 문득문득 그 강렬했던 울림이 느껴지고 기억이 났다.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쾅쾅쾅’이 ‘탕탕탕’으로 바뀌고 이후 책 제목을 <탕탕탕>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번역본마다 <쾅쾅쾅>’, <땅땅땅>, <탕탕탕>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쾅쾅쾅’과 그 이후 변하게 된 ‘탕탕탕’의 소리가 더 맘에 들었다. 그러다 ‘탕탕탕’의 울림이 ‘통통통’으로 바뀌게 된 사건이 있었다.      


최근 추석을 앞두고 아이들과 한복 관련 신문 기사를 읽었다.

“얘들아, 신문기사를 읽어보니 한복의 장점에는 뭐가 있지?”

“색이 예뻐요”,

“뚱뚱해도 잘 어울려요”

“바람이 잘 통해 건강에 좋아요,”     

“그럼 단점에는 뭐가 있을까?”

“옷 입고 벗기가 불편해요.”

“집에서 빨래를 못해요. 세탁소를 가야 해요.”

“옷이 비싸요.”

한복의 장점과 단점을 정리하여 글쓰기를 시작할 무렵 정훈이가 한마디 한다.      

 

“한복을 입고 절을 하면 돈을 받아요. 그리고 혼자 한복을 입고 학교에 가면 앗싸가 돼요.”     


정훈이의 통통 튀는 답변에 무릎을 탁 쳤다. 요즘 한복이 의미하는 문화를 정훈이가 한마디로 정리해 준거다. 매번 신문 읽기를 싫어하는 정훈이가 자신의 삶에서 느낀 절절한 한마디 안에 한복의 시대성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딱히 메모를 해 둔 것도 아니지만 정훈이의 이 한마디는 <쾅쾅쾅> 속의 화자처럼 나의 마음속에 ‘통통통’으로 남았다. 난 아이들의 이런 솔직한 감성이 좋다. 너무 솔직하고 엉뚱하여 때론 어른을 몹시 당혹스럽게 하지만 그 당혹스러움은 타성에 젖어있는 우리 어른들에게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문열 작가는 화자에게 끊임없이 들리는 ‘쾅쾅쾅’이라는 망치소리가 “관념의 타성을 깨부수어 그 타성에 젖은 세계 속에 함몰되지 않도록 우리의 의식을 깨어 있게 한다”라고 평한다. ‘관념의 타성’에 젖은 세상의 입장에서는 망치 소리를 듣는 화자를 비정상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 역시 늘 타성에 젖는 것을 경계하려고 애쓴다. 말 그대로 애를 써야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세상 속 타성에 젖어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타성에 젖지 않고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사는 것은 스스로 망치 하나를 들고 여기저기 ‘쾅쾅쾅’ 두드리고 다니는 꼴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자신의 망치를 잃어버리고 이젠 누군가 들려주는 ‘쾅쾅쾅’ 소리에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다. 그마저도 들리지 않는다면 타성의 늪에 이미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타성에 젖지 않고 스스로 망치를 들고 다니며 두드리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타성에 쉽게 젖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망치 하나를 들고 태어났다. 난 그 망치를 그들의 뿅망치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그 뿅망치 소리는 다자이 오사무의 ‘쾅쾅쾅’도 아니고 나의 마음을 두드리는 ‘탕탕탕’도 아니다. 그들의 소리는 ‘통통통’이다.


아이들로부터 비롯된 모든 소리나 행동에 어울리는 소리가 ‘통통통’이다. 아이들 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통통통’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어른과 달리 세상의 타성에 젖지 않은 그들의 말과 행동 모두가 ‘통통통’ 거린다. 마치 ‘통통통’은 아이들에게 “그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면 굳이 묻지 않더라도 절로 알게 되는” 그런 말 같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상을 그들의 뿅망치로 여지없이 두드려 부순다. ‘통통통’.  어른들이 보기에 아이들의 뿅망치 소리는 늘 시끄럽고 불편하다. 그러니 아이들의 뿅망치 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잔소리를 한다.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른들이 듣기 싫은 것이다. 나 역시 오랜 시간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의 공부를 지도한답시고 아이들의 뿅망치 소리가 시끄럽다고 잔소리하고 심지어 그 뿅망치를 빼앗아버리진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아이들이 자신만의 뿅망치를 잃어버린 사실도 잊게 만든 것은 아닌가 반성하며 아이들이 ‘통통통’ 거릴 때 잠시라도 귀 기울여 듣고자 노력한다. 그래야 우리도 세상의 타성에 젖어들 순간 ‘쾅쾅쾅’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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