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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Aug 09. 2023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아침...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의자에 앉아 책상 위 어지럽게 놓인 책들을 바라보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충분하다>란 시집이 눈에 띄었다. 시집의 표지를 보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쉼보르스카는 그녀의 시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이지만, 난 그녀를 <읽거나 말거나>란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녀의 글이 좋아 그녀의 시집을 구입했다. 그녀의 유고 시집인  <충분하다>이다. 시집 제목 <충분하다>처럼 그녀의 시를 읽고 나면 내 삶 속 텅 빈 곳이 ‘충분’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전에 읽던 책을 다시 볼 때는 접혀 있는 부분부터 읽는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어떤 이유로 접었는지 기억하기 위함이다.      


<십대 소녀>... 뭐지 이 낯선 제목은?  

    


십대 소녀

                                   비스와봐 쉼보르스카

십대 소녀인 나?

그 애가 갑자기, 여기,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친한 벗을 대하듯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한테는 분명 낯설고, 먼 존재일 텐데     


태어난 날이 서로 같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만으로

눈물을 흘려가며, 그 애의 이마에 입맞춤할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엔 다른 점이 너무나 많다,

단지 두개골과 안와(眼窩),

그리고 뼈들만 동일할 뿐.     


그 애의 눈은 아마도 좀더 클 테고,

속눈썹은 더욱 길 테고, 키도 좀더 크겠지,

육체는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로

견고하게 싸여 있겠지.     


친척들과 지인들이 우리를 연결해주는 건 분명하지만,

그 애의 세상에서는 거의 모두들 살아 있겠지,

내가 사는 곳에서는

함께 지내온 무리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는데.


우린 이토록 서로 다른 존재,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

대신 뭔가 더 가치 있는 걸 알고 있는 양 당당하게 군다.

나는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함부로 확신하지 못한다.     


그 애가 내게 시를 보여준다.

이미 오랜 세월 내가 사용하지 않던

꽤나 정성스럽고, 또렷한 글씨체로 쓰인 시를.”     


나는 그 시들을 읽고, 또 읽는다.

흠, 이 작품은 제법인걸,

조금만 압축하고,

몇 군데만 손보면 되겠네.

나머지는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다.     


우리의 대화가 자꾸 끊긴다.

그 애의 초라한 손목시계 위에서

시간은 여전히 싸구려인 데다 불안정하다.

내 시간은 훨씬 값비싸고, 정확한 데 반해.     

작별 인사도 없는 짧은 미소,

아무런 감흥도 없다.     


그러다 마침내 그 애가 사라지던 순간,

서두르다 그만 목도리를 두고 갔다.     


천연 모직에다

줄무늬 패턴,

그 애를 위해

우리 엄마가 코바늘로 뜬 목도리     


그걸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비스와봐 쉼보르스카의 <충분하다>에 수록



 

이제야 이 시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이 시를 읽고 종이의 모서리 부분을 접어 둔 이유는 이 시가 전에 읽었던 한 단편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방금도 이 시를 읽으며 그 단편을 바로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     


<연못 안의 두 이미지>.


이 단편은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를 붙인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25번째 책인 조반니 파피니의 <도망가는 거울> 속에 실려 있는 단편이다. 2014년 경 거울에 관한 이야기를 찾다가 알게 되었지만 기억은 <연못 안의 두 이미지>에만 남아 있다.      


글 속 화자는 오랜 전 자신이 살던 정원에 가서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연못을 발견하고 그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다 십 대 시절의 자신을 만난다.       


“나는 몇 분 동안 가만히 연못에 비친 내 모습을 응시하며 시간의 법칙을 생각했다. 그때 내 얼굴 옆으로 또 다른 얼굴이 수면에 그려지는 게 보였다. 나는 획 돌아다보았다. 한 남자가 내 옆에 앉아 있어서 수면 위의 내 모습 옆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렇게 화자는 과거의 자신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때부터 내 생애 가장 특별한 시간들 중 하나가 시작됐다. 내 삶은 이미 보통 사람들의 삶과 달랐다. 나는 나 자신, 즉 과거의 나 자신과 생각지도 못했던 즐거운 며칠을 보냈다. 두 개의 내가 포장이 떨어져 나간 길을 조용히 걸어갔다.”  

   

“처음 몇 시간 마음속 이야기를 훌훌 털어놓고, 며칠간 옛 기억을 실컷 회상하고 나자,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가 난폭해 보이기도 했다가 하는 친구의 기괴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려 애썼고, 그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짜증 나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도시에서 떠나지 못하게 억지로 막았다. 내 증오와 절망감은 시시각각 커졌다”     


결국 화자는 그 소년을 죽여 버린다. 견딜 수 없어서 죽였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죽이다니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어차피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든 것”이기에 뭐든 가능한 것이 허구고 소설이라지만, 파피니는 너무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그럴싸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처럼 생생하게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추천한 책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화자의 모든 말과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뭐가 좋은지 바보같이 실실 웃음이 날 때면 내가 나 자신을 죽이고도 멀쩡히 살아가는 유일한 남자일 거라고 생각해 본다. 그런 생각을 해봐도 실없는 웃음을 거두고 진지해지지는 못한다.”     


사춘기 시절의 나, 그땐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에 집중한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나의 생각이 제일 중요하고 그 시점의 상황이 가장 심각하다. 그러면서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로서 ‘미래의 나’를 상상한다. 오직 ‘미래의 나’만이 ‘십 대의 나’ 즉 ‘현재의 나’가 가지는 생각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렇게 어린 시절 ‘미래의 나’를 갈망하고 꿈꿔왔다.      


하지만 세상을 좀 더 오래 살아본 ‘현재의 나’는 어떤가. ‘현재의 나’는 ‘현재의 나’라고 주장하는 ‘과거의 나’가 상상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질 때가 많다. 딱히 잘못한 것은 없는데... 그저 그때의 미숙함과 유치함, 고집불통의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파피니는 ‘죽일 수밖에 없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흐르는 강물 속에 놓인 것처럼 끊임없이 변화 속에 살아가고 그 자신도 변한다. ‘과거의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미숙한 모습 그대로 변화 없이, 발전 없이 살 수는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존재로 성숙해져가야 한다. 그러니 ‘과거의 나’는 과감히 ‘죽임을 당하는 존재’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나간 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런 생각들을 짧은 이야기로 깔끔하게 구현한 조반니 파피니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그리고 잊힐 뻔한 작가를 우리에게 소개해 준 ‘위대한 사서’ 보르헤스에게도 감사를 표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얼마 후 쉼보르스카의 <십대 소녀>를 읽게 된 것이다.


소설과 형식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의 시를 읽었다. 보르스카는 십 대의 자신을 ‘떠나가게 두었고’ 파피니는 ‘죽였다’. 마치 둘이 은밀한 곳에서 만나 서로 시와 소설을 쓰기로 약속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건 나의 상상일 뿐이다.       


조반니 파피니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1881년 출생하여 1956년에 사망하였다. 쉼보르스카는 폴란드 출신에 1923년에 출생하여 2012년에 사망하였다. 시간적으로 겹치는 시기가 있지만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기록을 찾지는 못했다.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둘 다 시인이라는 점이다. 비록 파피니는 소설로 쉼보르스카는 시로 표현했지만 그 의미는 서로 맞닿아 있다.      


두 글을 모두 마흔이 넘어서야 읽게 되었다. 어쩌면 마흔이 넘어서 읽었기에 두 시인의 글에 공감하게 된 것은 아닌지...     


내가 사춘기 시절에 쉼보르스카의 시와 조반니 파피니의 글을 읽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아마도 지금 느끼는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리라. <연못 안의 두 이미지>에서 죽임을 당한 화자의 과거 모습과 쉼보르스카가 언급한 대 소녀의 입장에 더 감정이 실렸을까? 아마도 ‘떠나보내야 하고’, ‘죽여야 하는’ 존재로 표현한 시와 소설에 분노하지는 않았을까?      


만약 내가 '십 대의 나'를 만나면 제일 먼저 비스와봐 쉼보르스카의 시 <십대 소녀>와 조반니 파피니의 <연못 안의 두 이미지>를 함께 읽어보자고 할 것이다.     


읽고 나서...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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