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왜 웃는 겁니까? 재밌어요?”
“습관이에요. “
황은채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원우가 비추는 불빛을 손으로 가리며 걸어왔다. 노란 불빛 속에서 걸어오는 황은채는 그날의 황은수와 많이 닮았다.
돈이 없다고 했던가? 어느새 기억이 흐릿해졌다. 백유리는 그깟 3천만 원이 없냐며 짜증을 냈고, 정태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는 척했다. 한마디로 돈을 주는 자에게 원본 영상을 넘기겠다는 협박이었다. ‘나는 뭐라고 했었지?’ 원우가 그 기억을 더듬는데 황은수의 동생이 끼어들었다.
“언니가 죽고, 엄마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원우는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빠 몰래 엄마한테 삼천만 원을 해달라고 했는데, 민박집 공사 때문에 은행에 대출이 많았거든요. 엄마랑 언니 사이가 많이 안 좋아졌어요. 언니가 죽고 … ”
은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주 잠깐 그때로 돌아간 은채는 까맣게 말라가던 엄마의 뒷모습을 보다가 돌아와서, 다시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매일매일 똑같이 말했어요. 얼마나 외로울까?… 엄마한테 일부러 웃어주다 보니까 이젠 습관이 됐어요.“
원우의 손전등 불빛은 그와 은채, 그 사이 어디쯤에서 머뭇거렸다.
“엄마는 … 공식적으로는 실종 상태예요. 시신을 찾지 못해서. “
황은채는 손전등 불빛으로 길 끝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쭉 가면 선해미 해변이에요. 친구분이 혹시 가셨다면 그쪽일 가능성이 높아요. 거기서 다치거나 길을 잃거나 그랬을 거예요.”
그는 황은채를 따라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올라간 만큼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 역시 가파르겠구나 싶었다. 극심한 안개 속에서 발을 헛디뎠다면 의식을 잃었을 수도 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내 눈으로 봤잖아.’
안개 속에서 나타났던 안정태가 떠올랐다. 안정태의 얼굴이 분명했는데, 자신이 백유리라고 했던 것은 꿈이 아니다.
“사이렌이 울리면 섬 사람들은 밖으로 안 나갑니까? 비명 소리가 들리든, 도와달라는 소리가 들리든 집에만 있어요?”
“그럴 거예요. 그게 규칙이니까. “
은채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노란 손전등 불빛을 언덕 위로 옮겼다. 불빛 속의 언덕은 길의 끝이었다. 그 너머에 있을 바다는 보이지 않고, 파도 소리만 괴물의 숨소리처럼 들려왔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소리는 밀려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원우의 머릿속도 똑같았다. 멈추지 않는 의문 하나가 계속 반복됐다.
“그렇게 위험한데, 그게 규칙인데, 그런데 왜 우리한테는 나가보라고 한 겁니까? 사이렌까지 울렸는데.”
은채의 대답이 조금 늦어졌다. 언덕을 비추던 그녀의 손전등 불빛이 돌아와 이원우를 비췄다. 어둠 속에서 동그란 손전등 불빛을 마주하자 오히려 눈앞이 흐려졌다.
“죄송해요. “
목소리만 들리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는데,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원우는 손전등을 옮겨 은채의 표정을 보려 했다. 하지만 불빛끼리 부딪치자 더 밝아졌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게 뭔가요? 안개가 끝날 때쯤 볼 수 있다고 한, 그거요.”
“혹시 뭐 보셨어요?”
빛 속에서 은채가 물었다.
“보신 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
“… 아뇨.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원우는 손전등을 치우고 언덕을 올랐다. 터질 것 같은 심장 박동은 가파른 길을 걸어서일까? 그가 은채에게 한 말 때문일까?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아버지의 이름 앞에 경찰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아무것도 조사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이름도 얼굴도 감춰졌다. 황은수의 죽음은 그렇게 종결됐다.
언덕의 꼭대기에 다다르자, 파도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하늘 높이 뜬 보름달 아래 넓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해변이 내려다보였다. 그것은 끝이 없을 것 같은 어둠이었다.
어둠 속에서 원우의 손전등은 발아래를 더듬느라 급급했다. 발이 모래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은채를 찾아보았다. 은채는 이미 해변의 젖은 모래 위를 걷고 있었다. 원우는 모래에 푹푹 박히는 발을 옮기며, 핸드폰을 꺼내 정태의 번호를 눌렀다. 파도 소리 위로 연결음이 얹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유튜브 채널, 다 털어준다의 안정태입니다. 구독자 98만 다 털어준다는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리를 줄이고, 정태의 핸드폰 벨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지만 고요했다. 들리는 건 오직 파도 소리뿐이었다. 원우는 해변을 둘러보다가 멈칫하고 섰다.
황은채가 파도 가까이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 불빛이 반사된 황은채의 얼굴은 기괴했다. 웃고 있는데 웃는 것 같지 않은 얼굴. 안개 속에서 본 정태 같기도 하고, 노을을 보던 유리 같기도 했다. 원우의 시선을 느낀 은채가 핸드폰을 껐다.
“아빠가 찾네요. 어두워지면 위험하대요. 내일 아침에 다시 나오는 게 어때요?”
원우는 손전등 불빛을 바다로 옮겼다. 파도가 밀려오는 게 보였다. 파도는 생각했던 것보다 가까이 있었고, 밀물은 모래사장을 덮을 것처럼 한꺼번에 올라왔다. 피서철이 지난 해변은 무서우리만치 적막했다. 원우는 손전등 불빛으로 어둠의 부분 부분을 더듬었다. 그럴 때마다 어둠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언니가 유서를 남겼습니까?”
원우는 늘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7층에서 떨어져 얼굴이 뭉개진 채 죽은 황은수. 그 죽음은 미리 준비한 자살이었을까? 그날 충동적으로 저지른 자살일까?
“없었어요. 전 언니가 자살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살이, 아니면요? ”
저만치 있던 바다의 암흑이 그의 코앞에 바짝 다가왔다.
“자살을 … 당했다.”
그렇게 말한 은채는 또 미소를 지었고, 시간이 멈춘 두 사람 사이로 파도가 밀려왔다. 차가운 밤의 바닷물이 원우의 발등을 쓸고 지나갔다.
하늘을 보니 금세 떨어질 것 같은 별과 가득 차서 터질 것 같은 보름달이 바다 위에 떠있었다. 바다를 잔뜩 끌어당겼다가 있는 대로 토해낼 것 같은 달이었다. 안심하게 하고 멀리까지 나가게 했다가,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물이 차오른다면 그야말로 실종이다.
생각해 보니 너무 멀리 왔다. 물이 야금야금 차오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이원우는 자신이 무엇을 놓고 왔는지 떠올렸다. 백유리. 그녀를 숙소에 혼자 두고, 아니 황은수의 아버지와 둘만 남겨두고, 황은채의 손전등 불빛을 따라... 너무 멀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