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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리안치 圍籬安置

by 김사과


교동도 포구에서 바라보니 화개산에 옅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저 산 중턱쯤이랍니다. 얼마나 오래 걸릴까요?”


뱃사공의 말에 호산월이 전모의 너울을 걷어 하늘을 보았다. 바다에서 올라온 안개가 하늘을 가리고, 태양은 그 안개에 갇혀 빛이 흐렸다. 모래밭으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뱃사공을 두고 호산월은 화개산을 향해 걸었다. 한 손에 보자기로 싼 짐을 들고 걷는데, 초가집이 몇 채 나왔다. 집집마다 해풍에 생선을 말리고, 텃밭에는 오이와 가지, 부추 같은 것을 키웠다. 한여름의 습하고 뜨거운 날씨에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흘렀지만, 그런 어촌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 길을 따라 낮은 산을 조금 걸으니, 지붕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탱자나무 담이 보였다. 뾰족한 가시가 돋은 탱자나무 너머에는 돌담이 있는데, 그 가운데 출입문은 단단한 나무 대문이었다.


대문 옆에 나이 든 포졸 하나가 창을 들고 서있었다. 피곤하고 무료한 표정의 포졸은 호산월을 보자 창을 내밀며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여긴 아무나 올 수 없소이다.”


그러자 호산월이 소매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포졸에게 내밀었다. 포졸은 서찰을 읽다가 호산월을 봤다가 하기를 여러 차례 하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참...이거 곤란한데.”


포졸이 서찰을 접으며 고개를 갸웃대자, 호산월이 봇짐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포졸의 손에 넘겼다. 포졸이 주머니를 열어 안을 보았다. 반짝이는 은전이 가득 든 것을 보고서야 포졸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 서찰과 은전 주머니를 품 안에 넣었다.


“잠깐입니다. 아주 잠깐이에요.”




호산월은 포졸이 열어준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 열리는 소리에 2칸짜리 마루에 앉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사십이 넘은 남자는 육십이 넘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늙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머리와 수염은 하얗게 세고, 검게 탄 피부는 주름지고 말라비틀어져 나무껍질 같았다. 그는 귀신을 본 듯 호산월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산월은 봇짐을 평상 위에 올려놓고 그를 향해 큰절부터 했다.


“전하, 소인 송화루의 퇴기 호산월입니다. 동짓날에 반촌 주막에서 술을 따라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전하의 은혜 덕분에 여러 사람이 명을 이어갔답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느냐? 누가 들여보냈어?”

“우선 와서 앉으세요.”


호산월은 평상에 놓인 봇짐을 풀었다. 안에는 술병과 술잔이 있고, 접시에는 기름먹인 종이로 싼 시루떡과 민어전이 있었다. 호산월이 술잔에 술을 따라서 그에게 건넸다.


“나를 찾아 도성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냐?”

“예. 3일이나 걸렸습니다. 배를 몇 번이나 갈아탔는지 모릅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호산월은 젓가락으로 민어전을 들어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물안개 속에서 빛을 내는 태양으로 낮달이 다가갔다. 달은 아주 조금씩 태양을 먹어갔다.


“도성은 어떠하냐? 세자의 소식은 아느냐?”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궁은?”

“창덕궁이 불에 타서 전각이 다 소실되었지요. 할 수 없이 조카님께서는 창경궁으로 들어가셨답니다.”


그 옛날의 영광은 사라지고 초라함만 남은 왕이 술을 마시고 또 따라서 마신 후 탱자나무 담을 보았다.


“꿈을 꾸는 걸까? 하루 종일 저 담을 보고, 하늘만 보다가 어두워지면 어둠만 보다가 또 담을 보고, 하늘을 보고, 해를 보고 달을 본다. 그러다 보면 생각이 나. 이 섬으로 내가 내 형을 유배 보냈지. 어미가 다른 어린 동생을 보냈고, 조카를 또 보냈어. 그들이 자꾸만 꿈에 나타나서 잠을 잘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어. 파도 소리는 들려오는데 바다는 보이지도 않고.”


빈 술잔을 채운 호산월이 고개를 돌려 돌담 너머의 탱자나무를 보았다. 촘촘한 가시가 날카로웠다.




“위리안치의 위(圍) 자를 보면, 커다란 담 안에 또 작은 담 주위에 발들이 돌아다니는 형태입니다. 결국 다를 것이 없지요. 도성의 궁궐이나 교동의 유배지나.”


쫓겨난 왕이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궁궐에 계실 때, 전하께서는 커다란 담 안에 둘러싸여 밖을 보시지 못했고, 또 권력에 눈이 먼 자들에게 둘러싸여, 백성이 얼마나 괴롭고 희망 없는 삶을 영위했는지 모르셨습니다.”


달이 어느새 태양의 반이나 먹어버렸다. 주위는 점점 더 밤처럼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왕이 아닌 자가 호산월의 말에 넋이 나가 멍해졌다. 그러다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키려는 듯 눈썹에 힘을 주며 말했다.


“후금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새 왕은 줄타기를 잘하고 있느냐?”


호산월은 금세 빈 술잔을 다시 채웠다.




“반란으로 왕이 되었으니, 명나라의 인정을 받으려 들겠지. 명은 부패하여 곧 무너질 나라다. 그 빈자리를 후금이 내버려 둘까. 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이 작은 나라에 목줄을 채워두려 할 것이니, 반드시 전쟁이 또 터질 것이다.”


눈에 핏발이 서서 안에 담아둔 것을 호소했다. 그 위로 달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었다. 하늘을 보니, 달이 삼킨 태양의 빛이 테두리를 만들었다. 빛이 사라진 세상은 낮이었지만, 밤이었다. 달도 뜨지 않았으니 밤보다 더 어두운 낮이었다.


호산월은 품 안에 넣어두었던 향낭 하나를 꺼내 자리를 빼앗긴 왕에게 건넸다. 검은색 비단 향낭에는 하얀 호랑이가 수놓였는데, 그 표정이 무섭지 않고 따뜻해 보였다. 왕은 향낭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밀에 있던 생각시가 이걸 꼭 전해주고 싶다길래 제가 가져왔나이다. 안에는 말린 감국이 들었습니다. 곁에 두면 잠이 잘 올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백성이 죽어 나갈 것이다.”


탱자나무 담에 갇힌 사내가 향낭의 호랑이를 보며 계속 중얼거렸다.




“전쟁 때문에 왕이 되셨고, 전쟁 때문에 폐주가 되셨소이다. 전쟁 때문에 망가진 왕권이 아니라 망가진 백성의 삶을 돌보았다면, 탱자나무 담이 아니라 궁궐 담 안에 계셨겠지요.”


호산월은 다시 하늘을 보았다. 달을 벗어난 태양은 조금씩 빛을 찾아갔다.


“그토록 크게 지으시려던 궁은 말입니다. 창귀와 같은 것입니다. 그 미끼에 혹해서 대궐의 옥좌에 앉는다면, 그때 만나는 것은 호랑이 같은 백성이지요.”


호산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잔을 든 남자가 멍하니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교동도를 둘러싼 안개도 조금씩 걷혀가고, 하늘에 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주위가 훤해졌다.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또 겪고 이겨내고 살아낼 것입니다. 그 삶이 고달프겠지요. 전쟁이 끝나도 고통은 계속되겠지요. 그래도 살아낼 것입니다.”


호산월이 다시 마당에서 큰절을 올렸다.




“평안하시어요.”


커다란 나무 대문으로 호산월이 사라지고, 곧바로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에 뜬 해는 이제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밖에서는 탱자나무 담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창덕궁 높은 담 안이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호산월은 뱃사공이 기다리고 있을 포구 쪽으로 걸었다.


바닷물이 조용히 밀려오고, 밀려 나갔다. 삶이 그러했다. 무엇이든 밀려오고 밀려갔다. 사람이 오고, 사람이 갔다. 좋은 날이 오고, 좋은 날이 갔다. 슬픈 것도 아픈 것도 밀려오고, 밀려서 떠내려갔다. 그 파도에 쓸려간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패인 자리는 계속 패이고, 깎인 것은 흔적으로 남았다.


“그게 사는 거지.”





달과 호랑이를 그리는 단편집은
27회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좋아요와 댓글로
응원을 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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