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던 마라톤이 끝났다.
러닝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 만약에 마라톤에 나가신다면, 마라톤에서 달려야 하는 거리의 70%를 달릴 수 있으면 완주하실 수 있어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뛰다 보면 분위기에 휩쓸려 30% 정도는 없던 힘도 생겨 달리게 됩니다. 마라톤 뽕 무시 못합니다."
난 이게 우스갯소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 그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다른 사람으로 빙의되어 뛰고 온 느낌이었다. 과연 어땠길래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지난 글에서 처럼 주객이 전도되긴 했지만 여행의 마지막날에 예정된 마라톤 덕분에 틈틈이 러닝을 해왔었다. 물론 매일 3만 보 이상 걸으면서 근육의 피로가 거의 극한 수준이긴 했지만, 그래야 5km 아닌가.
맵 따라 달려보고
인증까지 남길 정도로 진심이었다. (사실 이 사진은 와이프에게 아침으로 뭘 사갈까 묻기 위한 짤방용이었다.)
그리고 대회 3일 전부터 내 명찰을 받으러 갈 수 있었다. 국내 대회에서는 우편으로 기념품인 티셔츠와 함께 오는 경우가 많은데, 큰 대회는 이렇게 방문해서 찾아가고 여러 이벤트를 즐기는 것 같다.
컨벤션 센터에는 여기저기 마라톤 배너가 가득했고,
저 벽이 마라토너들의 영상에서 자주 보던 출전자 명단이다. 내 이름을 찾아서 나도 옆에 사인을 하고 싶었지만, 그날도 여기저기 여행하느라 엄청 걸었기에 바로 수령장소로 갔다.
번호는 랜덤 하게 배정되고, 난 25~30분 구간인 Wave B이기에 명단 앞에 B가 붙었다. 난생처음 받아본 마라톤 명찰이 반가웠다. 뒷면에는 기록 측정을 위한 칩이 붙어 있다.
내 인식표가 잘 동작하는지 확인하는 부스에는 기념촬영도 도와주고 있었다. 명찰을 찍어보고 잘 인식하는구나 하고 가려고 했는데, 자원봉사자가 사진 찍겠냐고 먼저 물어와서, 고맙다며 사진 찍었다. 심지어 동영상도 찍어줬다.
여러 회사의 판매 부스와 체험 부스가 있었고, 자신의 페이스를 측정하는 트레드밀도 있었다. 이것저것 즐길 게 많았고, 사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애써 못 본 척 그냥 나왔다. 특히 아식스 러닝 티셔츠를 사고 싶었지만 나중에 풀코스를 뛸 때 사야지, 5km는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다. 나중에 풀코스 뛸 때 산다면 정말 큰 감동이겠다 싶었다.
대회는 아침 7시 반이었는데, 6시 반까지 모이라고 해서 새벽을 뚫고 출발지에 도착했다. 조금 일찍 와서 인지 아직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출발 게이트를 보니 조금씩 떨려왔다. 저기에 인식하는 센서가 있어서 저길 통과할 때부터 출발로 인식되는 방식이었다.
또 하나 놀란 점은 마라톤을 위해 임시로 만든 육교였다. 선수들이 달리는데 분명 길을 지나가려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그 불편을 막기 위해 아예 육교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슬슬 해가 떠올랐고, 살짝 추웠는데 해를 받으니 온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Wave B에도 사람들이 슬슬 모였고, 장내 아나운서는 열심히 톤을 올려 분위기를 띄워주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드디어 출발지로 이동!
날씨가 어마어마하게 좋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 맑은 하늘. 무엇 하나 빠질 게 없었다.
기록보다는 Fun running인 5km 답게 사람들은 다들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고,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다들 흥분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출발!
평소처럼 달리기 시작했는데, 너무 완주만 생각하고 달려선지, 페이스 조절을 실패했다. 에너지가 엄청 많이 남아있었는데, 거리를 보니 1km밖에 안 남았었다. 그래서 나머지 1km를 전력으로 뛰고 도착해 보니 27분. 페이스 조절을 잘했으면 25분도 가능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첫 마라톤을 완주했단 것이 너무 뿌듯했다.
남들 다 하는 메달 들고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인증 사진까지. 날이 시원해서 그런지 땀도 얼마 안 났고, 이대로 10km는 더 뛸 수 있을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날도 남은 여행 일정이 있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향하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내 기록이 나왔다. 내세울만한 기록은 아니지만, 내 첫 마라톤 기록. 나도 어쩌다 러닝을 시작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때는 이런 상상은 못 했겠지. 하지만 재미있는 게 없는 요즘에 러닝은 정말 큰 성취감과 즐거움을 주고 있다. 다음 마라톤도 더 즐거움을 줄거라 기대해 보며, 더 건강하게 달리기 위해 오늘도 어느 코스를 뛸지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