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내달리기엔 마라톤은 장거리 레이스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세웠던 목표는 5km를 쉬지 않고 달리기였다. 안 뛰던 몸이 뛰다 보니 금방 숨이 차서 뛰기 힘들었고, 뛰다 보니 무릎도 아파왔고, 페이스나 케이던스 등의 개념도 어려웠다. 다행히 포기하지 않고 뛰다 공부하다 훈련하다 보니 어느덧 5km는 쉽게 달릴 수 있게 되었고 큰 일정이 없는 한 매일 아니면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5km 이상을 달리고 있고, 시드니에서도 5km 마라톤을 27분에 완주할 수 있었다. 누구에겐 별거 아닌 기록이지만, 나에겐 뿌듯한 기록.
그런데 생각해 보니 조만간 회사 사람들과 함께 접수한 마라톤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번엔 5km가 아닌 10km.
10km는 확실히 5km랑은 달랐다. 5km는 달리는 기술이 부족해도 악과 깡으로도 달릴 수 있었는데, (물론 후유증은 크겠지만) 10km는 그 수준이 아니었다. 특히 40대 아저씨에게는 더더욱.
일단 5km처럼 동일한 페이스로 달리다가 막판 스퍼트 하는 전략으로 하기 어려웠다. 5km를 넘어가는 순간 다리가 너무 무거워지고, 그래서 원래 자세로 달리기가 너무 힘들었고 그러다 보니 균형이 무너지면서 어딘가 아픈 곳이 생겼다. 가장 큰 고민이 내 앞을 막아섰다. “어떻게 하면 더 길게 달릴 수 있을까?”
일단 할 수 있는 건 꾸준히 더 달리는 것이었다. 키로를 더 늘릴 수는 없었지만 6~7km 정도를 달리는 건 큰 무리 없이 가능했다. 그러다가 주말 저녁에 러닝을 나가서 6km를 달린 후 집 근처 트랙에서 한 바퀴를 더 뛰었다. 7km 정도를 달린 후 걸으면서 호흡을 정리하려던 생각이었다. 그런데 7km를 달린 후 걷는 게 아니라 6'30 페이스로 경보를 한번 뛰어 봤더니 걷는 것보다 속도도 어느 정도 유지가 되고 호흡도 곧 돌아오고 근육의 긴장감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1km를 더 뛰었다. 8km. 최장 거리 달성. 평균 페이스 5'48. 성공적이었다.
신기해서 이렇게 달려도 되는 건지 찾아봤더니 비슷한 훈련으로 젖산 역치 훈련(Lactate Threshold Training) 이 있었다.
요즘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예전 '라떼는' 시절에 학교에서 체벌은 흔한 이벤트였다. 당시 가장 싫었던 체벌이 오리걸음이었는데, 오리걸음 후 며칠간 허벅지에 알이 배겨 고생하던 생각이 난다. 당시 아픈 이유가 젖산이 근육에 박혀서 그렇다고 했었는데,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달리는 중에도 근육은 에너지를 만들면서 젖산(lactate)을 생성한다.
젖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리걸음 때처럼 생산 속도가 분해 속도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근육이 뻐근해지고 페이스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생산이 분해를 넘어서는 지점을 젖산 역치(LT, Lactate Threshold)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젖산 역치, LT를 관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는, LT를 버텨서 적응력을 높이는 훈련
또 한 가지는, LT로 쌓인 젖산을 회복하는 훈련
LT에 노출시켜서 그에 버티는 기간을 늘리면 페이스를 높였을 때 몸이 버티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LT 이후 최소한으로 페이스를 낮추면서 젖산을 분해한다면 최적의 상태로 더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이런 훈련 루틴을 짜봤다.
웜업 구간: 6'00 페이스, 20분
빠른 구간: 4'30 페이스, 10분, 심박수 확인 (최대 심박수)
회복 구간: 6'00 페이스, 10분, 경보에 가까운 러닝폼으로 골반을 많이 쓰고 발을 낮게 끌면서 에너지 최소화
복귀 구간: 6'00 페이스, 5분, 평소 케이던스와 러닝폼 복귀
도전 구간: 5'00 페이스, 5분, 에너지 끌어 올림
쿨다운 구간: 7'30 페이스, 5분, 가볍게 뛰며 심박수 안정화까지 유지
이렇게 달리면 빠른 구간에서 LT 적응도를 높이고 회복 구간에서 젖산을 분해한 후 도전 구간에서 다시 LT에 접근한다. 빠르게 달리다 천천히 달리기를 반복하면 심박수가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몸이 젖산을 처리하는 능력을 학습하게 된다. 실제로 해보니, 같은 평균 5'50 페이스라도 심박수가 훨씬 빨리 안정되고, 다리의 뻐근함도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릴 수 있단 자신감이 들었다.
(그렇게.. 11월 MBN 서울 마라톤을 하프로 신청하는 객기를 부렸다. 미래의 나에게 미안하다.)
위 훈련에서 특이한 점은 러닝폼이 바뀐다는 것이다. 어디서 본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하다 보니 그게 편했다. 빠른 구간에서는 골반이 수직으로 안정된 러닝폼, 느린 구간에서는 골반 회전을 활용한 경보 스타일로 폼을 바꾼다. 경보로 달릴 때는 골반을 더 쓰기 위해 엉덩이를 살짝 뒤로 빼고, 상체를 조금 숙인다. 다만 목을 너무 숙이면 목·어깨에 긴장이 생기기 때문에 시선은 5~10m 앞에 두려고 노력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변주를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자세를 바꾸면 사용하는 근육이 미세하게 바뀌어, 근육 그룹별로 잠깐씩 쉬는 시간을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골반이 수직으로 안정되면 햄스트링과 종아리를 주로 쓰는데, 경보로 뛰면 엉덩이와 고관절을 더 사용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게 부담일 수 있는데, 필라테스를 꾸준히 해서 고관절과 엉덩이 둔근을 강화해 둔 덕에 크게 무리가 되지 않았다. 새삼 느끼지만, 필라테스를 통해 허리와 복근, 엉덩이, 햄스트링 등 코어 근육을 단련한 게 러닝에 정말 큰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 꼭 추천해주고 싶은 조합이다. 필라테스와 러닝!
LT 훈련을 통해 장거리에 대한 자신감이 늘긴 하지만, 극한에 적응하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LT 훈련만 한다고 주행거리가 늘진 않는다. LSD(Long Slow Distance), 즉 60~90분 이상 느리게 달리며 지구력을 기르는 훈련과 조합해야 한다. 느리게 오래 달리기, LSD는 모세혈관을 발달시켜 산소 공급 능력을 높여주고, LT 훈련은 그 산소를 효율적으로 쓰게 해 준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면 10km, 그 이상도 훨씬 편안하게 달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LT만 하지 말고 (LT를 매일 하면 피로가 누적돼서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LSD와 번갈아 하고, 중간에 휴식도 꼭 끼워 넣어야 건강하게 오래 달릴 수 있다.
달리기에서의 휴식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몸이 회복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 작은 휴식 덕분에 여러분은 더 멀리, 더 오랫동안 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무작정 날 다그친다고 무한대로 성과를 낼 순 없다. 가끔은 페이스를 조절하고 몸에 회복할 시간도 필요하다. 달리기에도, 인생에도 휴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