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받고 하루, 이틀 정도는 부정적인 감정이 거미줄처럼 변해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끊어내려고 해도 끊어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하루는 불안과 우울 속에서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하다 이전에 그가 줬던 상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에는 작은 언쟁으로 시작하다 점점 다툼으로 번져갔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영화 <어벤져스>에 나오는 로버트 브루스 배너가 헐크로 변신하듯 다른 사람이 되어 소리를 질렀다. 상처를 준 그에게 원망의 말을 하며 차마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뱉을 수 없는 온갖 막말을 쏟아냈다. 차 안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지고 전화를 끊어대며 괴물처럼 행동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차를 타고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죽어야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대로 살아서는 그저 괴로울 뿐, 죽는 게 낫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거의 두 시간이 넘도록 소리를 지르며 운 나는 제풀에 지쳐 겨우 진정했다. 나는 나의 괴물 같은 모습에 말을 잃었다. 그토록 사랑한다고 했던 남자친구 얼굴을 볼 자신도 없었다. 거울 속 내 자신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또 모든 진이 빠진 채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상담사에게 이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자 그녀는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언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자세하게 계획을 세웠는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등 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나에게 ‘생명 존중 서약서’를 작성하자고 이야기했다. 평범해 보이는 A4용지에는
‘나는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절대로 자살하지 않을 것을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고통에 갇혀있던 나는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기까지 이르렀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예약했고, 며칠 후 그토록 가기 싫었던 그곳을 제 발로 가게 되었다. 내가 간 병원은 생각보다 다른 병원과 비슷했다. 진료 대기 중인 사람들도 나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해 보이는 이들이었다. 심리상담센터에서 했던 검사보다 더 자세한 검사를 했다. 검사를 마치고 진료를 기다리는데, 또 작은 방 안에 숨 막히도록 있을 생각에 어지러웠다.
참 다행인 건 내가 사람 복은 있다는 것이다. 처음 본 의사는 차분했고, 친절했다. 현재 나의 불안과 우울은 극도로 높은 상태라고 알려주며,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라면 빠른 치료가 필요하다고 안내했다. 그녀는 나의 상태에 대해 세심하게 설명해 준 후, 항불안제와 항우울제를 처방해 주었다. 그렇게 그날부터 나는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