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박물관을 관람하다 납득되지 않는 시대적 미의 기준 때문에 도무지 어떤 부분에 탄복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이 매긴 미의 기준은 계속해서 변해왔다. 문화에 따라 상이하기도 한 이 기준은 그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름다움을 단선적인 기준 위에 세워 왔다. '존예'로 압축되는 현대 사회의 아름다움 기준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온 것일까? 그 기준이 무엇이기에 그에 벗어나는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거침없는 외모 품평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접영은 '수영의 꽃'이라 불리는 영법이다. 접영 동작은 돌고래의 꼬리처럼 다리를 모아 채찍처럼 차며 물속과 물 밖으로의 방향을 빠르게 전환해나가는 것이 기본 메커니즘이다. 이에 양손으로 항아리 모양을 만들며 물을 잡아 뒤로 밀며 출수하고, 다시 물 밖에서 양 팔을 되돌림과 동시에 입수하는 팔 동작이 포개어진다. 한참 접영을 시작할 무렵, 물을 모아 뒤로 밀어내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당시의 내 접영은 접영이 아니라 '저 병...... (ㅅ)'이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어깨와 등에 접영을 위한 기본 근육이 없어서였다. 이것은 접영을 배우기 전엔 전혀 문제라 생각하지 않았던 영역의 것이라 꽤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 후 몇 개월간 지속적으로 접영 팔 동작을 연습을 했고 점차적으로 물을 잡는 양이 늘어나면서부터 눈에 띄게 등과 광배에 근육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등과 어깨 그리고 광배에 발달한 근육들을 보며 마치 업어 키운 내 자식처럼 자랑스러워했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근육들이 한순간 내게 심란한 마음을 안겨주게 된 것은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여름 파리 올림픽의 수영 경기를 보면서였다. 엄청난 승모와 광배와 기타 이런저런 근육을 가진 선수들을 보면서 내가 가진 미의 기준을 자기 검열하기 시작했다. 어이없겠지만 (쓰면서도 어이없지만) 수영을 더 열심히 하다가 선수들의 체형처럼 나의 몸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영역을 거슬러가게 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수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그 근육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가지게 되는 것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지독한 오만을 느낀다. 사회에 통념적으로 퍼져있는 아름다움의 얕은 기준에 안일하게 미를 감각하는 촉수들을 내어줘 왔다는 뼈아픈 통찰이 나를 지배했다.
가수 마돈나는 그의 노래 <Vogue>에서 'Beauty's where you find it(아름다움은 네가 발견하는 곳에 있어)'이라 말한다. 자신과 듣는 이들 모두를 아름다움의 시금석이라 여겼던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미를 가진 그녀가 개별의 시선이 닿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하는 점에 있어 일종의 위선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성성'이라 일컬어지는 그가 가진 독창적이고 빼어난 아름다움을 마음껏 이용해서 자신의 의견에 힘을 싣는 모습에서 감동을 느낀다. 왜 숏컷의 여성은 무례한 시선을 감수해야 하는가. 어째서 여성의 체형 변화는 손쉬운 가십거리가 되는가. 나는 이 의문의 연장에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 있음을 알았다. 기능이 아닌 세상의 시선을 기준 삼은 아름다움을 우선했던 내 생각을 조용히 식힌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아름다움을 다시 바라본다. 홈이 져 갈리진 근육들 사이로 '풍채'라는 말이 떠오른다. '드러나 보이는 사람의 겉모양'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이 단어를 나의 몸 위에서 느낀다. 드러나 보이는 것들이 바꾼 내 일상과 역량들을 떠올리니 굵어진 사지가 나를 또 감격스럽게 한다. 더 이상 내 사유의 산물인 나의 풍채를 '존예'라는 말 앞에 압도당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타인들이 발견한 개별의 아름다움에 마음의 빗장을 풀어 보려 한다. 내 풍채를 존중받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발견한 광배의 세계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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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지만 이번 글을 쓰면서는 특히 <Vouge>를 무한 반복했다. 이 곡을 듣는 동안 계속해서 곡을 노래한 마돈나와 OST로 수록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을 떠올렸다. 이 두 언니(멋있으면 다 언니)의 팬으로서 두 사람이 내가 아는 중 가장 멋졌다 생각했던 순간들을 공유해 보고 싶다. 그릇의 깨끗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깨끗한' 여성만이 사회에 존재할 수 있었던 시대에 마돈나는 자신이 가진 양날의 검 같은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서 부정과 주체성을 동시에 얻었다. 이 똑똑한 사람에게 어떻게 마음이 쏠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그의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나의 원픽 <Vouge> 무대 영상을 먼저 공유해 본다.
Madonna - Vogue (Live at the MTV Awards 1990) [Official Video] (youtube.com)
메릴 스트립 자랑은 자칫 '유재석 칭찬하기' 같은 느낌이 들어 머쓱한 감이 있지만, 좋은 건 나누고 싶으니까 계속해 해보겠다. 그의 화려한 필모와 훌륭한 연기를 뒤로하고 내가 그에게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장면은 단연코 골든 글로브 공로상 수상소감이었다. 시혜의 언어가 아닌 세밀한 관심으로 우리 모두가 소수자 임을 일깨워 주고,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견제하기 위한 원칙 있는 언론의 필요성에 피력하고, 혐오가 혐오를 덮어가고 폭력위에 폭력이 쌓이는 이 현실 속에서 복수가 아닌 예술로 그 마음을 승화시켜 내자는 이 수상 소감을 나는 1년에 한두 번쯤은 필연적으로 닥치기 마련인 인류애를 잃는 일이 생길 때마다 찾아본다. 두 사람 모두 시대적 낙인을 가진 보이는 직업군의 여성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강점과 영향력을 영리하고 정확하게 인지하여, 그 힘을 이다지도 예술적이고 철학적으로 전파해 나간다. 이런 말아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영리한 두 사람은 내게 '개싸움을 우아하게 하는 법'을 알려준 인물들이다. 자신의 지위에 매몰되지 않고, 한 치의 오염 없는 태도로 생각을 펼쳐나가 마침내 본인에게 유리한 링 위로 상대를 유인해서 압살하는 이렇게 지적이고 우아한 개싸움이라니. 진짜 존-나 멋지다. 이 멋짐은 '존나'의 말맛으로만 살릴 수 있는 멋짐이니 그냥 쓴 대로 올려야겠다. 아, 오늘은 미국 쪽으로 절이라도 할까 보다. 만수무강하세요 언니들.
메릴 스트립의 Cecil B. DeMille 상 수상 소감 (Kor Sub)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