솨아아. 개수대 위로 분주히 고무장갑을 낀 손이 움직인다. 납작한 접시, 오목한 찬기, 투명한 유리잔을 씻어 나가는 손놀림은 긴 시간 몸에 밴 습관처럼 그 형태에 알맞게 이루어진다. 익숙한 기물만을 다루는 관계의 공백 동안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떠다니다 부딪히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깨어진 생각들 사이로 무언가 밀도가 다른 관념이 표면으로 번뜩 떠오른다. 재빨리 고무장갑을 벗고 메모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작은 몸피들이 '엄마!' 하고 달려온다. 찰나의 순간 사라져 버리는 그 생각들을 그 후로 수없이 긴 시간 동안 형태를 갖지 못한 채 어슴푸레하게 내 주변을 떠돈다. 어디 아이의 부름뿐일까. 각종 알람과 메시지,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광고와 하던 생각도 멈추게 만드는 뉴스까지. 수없이 많은 형태의 부유물에 의해 관념의 분주는 가로막힌다. 필기도구와 수첩 없이 책만 달랑 들고서 외출한 날의 독서는 어떤가. 책의 귀퉁이를 접으며 낱장 위로 떠오르는 생각에 대한 정리를 잠시 미룬 후, 다시 찾은 그 페이지는 언제나 내게 당혹스러움을 선사한다. '도대체 왜 이 페이지를 접은 걸까?' 골똘히 생각하다 포기하고 접힌 자국이 선명한 책 귀퉁이만 원래대로 펼쳐 애꿎게 꾹꾹 눌러댄다. 접힌 자욱이 펴지면 머릿속에 다시금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 책장을 누르는 손톱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힘주도록 만든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생각,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나로 인해 붕괴된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이라도 한 걸까. 깊은 바다로 침잠해버린 생각은 오랜 시간을 들여 얕은 물가를 서성여도 소식이 없다. 그렇게 제때 내보내지 못한 생각들이 습관적으로 들여온 글과 말들, 떠돌던 소음, 막으려 애써도 시나브로 옮아나간 감정들과 함께 뒤섞여 가는 과정이 점점 고조화되고 있었다. 치맛단 속에서 조용히 올이 나가기 시작한 스타킹처럼 나만 알 수 있었던 이 작은 혼란은 어느새 점점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을만한 것이 되었다. 이 상황을 보며 더는 이런 식의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몸에 익은 것이란 얼마나 지독한가. 내 관념의 장은 어느 순간 물건이 쌓이기 시작한 다용도실 한편처럼 명확히 분류할 수 없는 것들이 무더기로 키를 높여가는 곳이 되어있었다. 그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조금은 어중간한 마음으로 여행 가방을 들고 떠나게 된다.
여행의 첫걸음인 공항으로 향하는 길. 이 길에 오른 순간, 생활을 지배하는 익숙한 리듬이 깨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익숙한 일상의 감각에 기대어 타인의 생각과 감정들을 쏟아붓기 바빴던 하루의 시작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행선지로 가기 위한 길과 이동 수단을 확인하고 오롯이 가야 하는 곳과 그곳으로 옮겨질 나와 가족들의 실제적인 것들을 체크하는 것처럼 출발과 도착을 반복하는 시간들이 선을 이룬다. 그렇게 일면식이 없는 도로와 풍경을 바라보며 낯선 감각을 느끼는 순간들 속에서 차츰 무언가 명료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일상의 타성에 젖지 않고 느끼는 새로운 감각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언어들 속에서 나의 존재는 수많은 여행객 중 하나로 희미해졌지만, 생각은 점차적으로 명확한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강제적으로 선사된 오롯이 한 가지 일만을 할 수 있는 순간들이 내게 준 선물에 나는 짧게 몸서리치며 환호했다.
이 경험의 여운을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되도록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격려한다. 시답잖은 일이라 여긴 일들 위로 드리워진 효율의 그늘들을 걷어내면서 나를 이루는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다. 욕심껏 쌓아 둔 타인의 관념들과 문장을 헤집는 일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그 짧은 여행은 엉망이던 사유의 방을 관념이 차곡한 곳으로 정리할 용기와 더불어 휘발되는 생각들을 잡아둘 수 있는 감각적인 명료함을 맛 보여 줬다. 진은영 시인은 그의 저서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에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기억하지 못 하지만 없진 않다는 그 무엇들을 헤아린다. 제때 기억해 내지 못 한 생각이 생채기 낸 순간들이 뭉뚱그려진 채 먼지처럼 나뒹군다. 그 부정형한 찰나들을 언제쯤 의식이 거쳐온 기항지라 되짚을 수 있을까. 기어코 그 찰나의 정채(精彩)를 보고야 말겠다는 하루의 의지가 또 하루만큼을 또렷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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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뭘 그렇게 듣고 있어?"
양 귀에 이어폰을 꽂은 나를 바라보며 남편이 묻는다.
"듣는 게 아니라 이어폰 케이스를 찾지 못해서 일단 귀에 꽂고 있는 거야."
"그럼 이어폰 케이스를 찾아서 꽂으면 되지 왜 굳이 귀에다 꽂아두는 거야?"
"이어폰 케이스를 찾으면 이어폰을 어디에 뒀는지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지. 껄껄. 아직도 나를 모르는구먼"
"......"
찰나를 붙잡지 못하는 이유가 어쩌면 삶의 방식의 문제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언제나 물건을 이쟈묵고, 생각을 빠쟈묵는 사람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