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말이면 강사님의 눈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 다니기 바쁘다. 말을 붙이기 무섭게 탈의실로 도망가는 한편, 물속으로 도망치기를 몇 개월째.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듯 이번 달엔 제대로 칼을 갈고 강사님이 버티셨다.
"더 이상은 안 돼요. 다음 달에는 교정반으로 올라가세요."
세상 시무룩한 표정으로 체력이 형편없고, 아직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하소연해 보지만 소용없다고 자르신다. 다음 달에 이미 교정반으로 올려뒀단다. 중급반에서 고급반으로 대거 인원이 유입될 거라며 고급반 선두가 자리를 비워줘야 하니 승급을 시키겠다고 한다.
아뿔싸, 이를 어째.
나는 고급반 여포다. 낯과 장소를 많이 가리는 탓에 내 영역에서는 칭찬받고 날뛰지만 원정 수영이 웬 말인가. 수업을 받는 레인 이외에 다른 레인에 가기만 해도 긴장해서 수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밥 먹듯이 드나드는 수영장에서 어웨이 레인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숨이 짧아진다. 그런데 교정이라니. 수업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지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고 헉헉대며 숨을 고르는 사람들 속으로 떠나라니!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날래고 번뜩이는 푸른 수경을 낀 교정반 1번(순번)에게 채 한 바퀴를 돌기 전에 따라잡히는 꿈. 그렇게 교정반 첫 수업 전날. 나는 잠을 잤다 말았다 하며 긴 밤을 보냈다.
교정반 첫 수업 일이 밝았다. 매일 오는 수영장이지만 어쩐지 익숙하지 않다. 긴장하지 말자 다짐하며 가볍게 몇 바퀴를 돌며 몸을 푼다. 그런데 9시 수업이 시작했는데 강사님과 나 이외에 아무도 없다. 이 상황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옆 레인인 고급반에서는 서로서로 인사를 하며 '수영복이 바뀌었네', '오늘은 빨리 왔네'하며 가벼운 안부를 묻기에 바쁘다. 고급반 동료들에게 날 좀 봐달라고 애원 섞인 눈빛을 보낸다. 다정한 그들은 속도 모르고 "다례 파이팅!"한다. 파이팅이고 나발이고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눌러둔 채 강사님과 마주 보며 단둘이 체조를 시작한다. 체조를 마칠 무렵 하나둘씩 자리를 채우며 교정반 어머님들께서 들어오신다.
"어머, 자기 올라왔어?"
교정반의 꼬리를 담당하시는 어머님 무리가 해사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신다. 그러고는 자기는 젊으니 무조건 앞에 서라고 말씀하신다. 괜찮다고 극구 손사래 쳐본다. 그러니 본인들은 나이가 많아서 못 따라간다고. 옆 레인에서 수영하는 거 다 지켜봤다고. 자기가 우리보다 빠르다고. 그들은 서로서로의 말에 공신력을 실으며 계속해서 내 등을 앞으로 떠민다. 어머님 무리와 나밖에 없는 상황. 일단 어머님들의 푸시와 강사님의 지시대로 선두에 서서 출발한다. 한 바퀴를 채 돌기도 전에 나는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뒤돌아 원망 섞인 목소리로 어머님들께 묻고 고 싶어졌다. 나이 들어서 못 따라오신다면서요! 죽기 살기로 가고 있는데 왜 여유 있게 따라잡으시냐고요! 그러면서 왜 저를 뒤에 보내시지 않으시냐고요! 뒤늦게 알고 보니 그녀들은 내 나이보다 더 오래 수영을 해온 이들이었다. 그녀들은 접영을 가뿐히 한 바퀴 돌고 개운해하며 말했다.
"어우, 접영을 해야 수영을 하는 것 같아."
나는 배신감에 몸을 떨며 다시는 칭찬에 춤추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몇 바퀴를 돌고 나니 안면에서 쏟아질 수 있는 모든 액체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디서 아가미라도 구해 달던지, 돌고래처럼 정수리에 숨구멍을 내든지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있을 무렵 뒤늦게 교정반의 선두그룹이 입장했다.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이 걷히자마자 강사님께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조합의 수영 드릴(연습 기법)을 시키셨다. 앞서 나가는 선두 그룹의 예시를 집중해서 보며 팔과 다리에게 "봤지? 이해했지? 할 수 있겠지?" 하고 제차 다짐을 받듯 묻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출발 이후로도 그들은 답이 없다. 무엇인가가 원만하게 합의가 되지 않은 듯한 타이밍으로 물속을 삐걱대며 나아간다. 중도에 멈출 수는 없었다. 눈앞에 있던 앞선 이의 발꿈치가 갈수록 멀어져 갔고, 내 발가락에는 수력 30년의 어머님이 인 물보라가 닿기 시작했기에. 수경 속에 눈물이 차오른다. 앞서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신세로 도망친 전쟁 포로처럼 헤엄치다 한 시간이 흘렀다.
눈물이 차오른 수경으로 쫓아가고 쫓기기를 며칠째. 첫날의 힘듦은 힘든 것이 아니라는 듯 무시무시한 '종이 선생님'을 뵌 날도 있었다. 여기서 종이 선생님이란 강사님의 연차, 교육 일정에 의한 선생님의 부재를 대신해 연습 내용을 적어 놓은 종이를 말한다. 이 종이를 킥 판 두 개를 'ㅅ' 자로 세워둔 빗면에 붙여두고 운동하는 날을 '종이 선생님이 오신 날'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교정반에 오고서야 알게 되었다. (고급반 이하의 경우 강사님께서 종이 따위에 맡길만한 수강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3D 대체 선생님께서 수업에 들어와 주신다) 종이 선생님이 오신 날은 성실하고 체력 좋은 1번을 따라 쉬지 않고 지시대로 운동을 해야 한다. 몇 바퀴를 돌고 있는지 셈이 흐려질 무렵부터는 고급반이 그리워진다. 선생님의 지시대로 한 바퀴를 돌고 물 밖으로 나올 때마다 '어우 시발'하고 욕을 하던 6번 아주머니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가만히 지켜본 교정반의 사람은 하나같이 말이 없다. 매 순간 깔깔거리는 이전 반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누가 급훈으로 '말을 할 시간이 있거든 숨을 고르자'라고 써 붙여놓은 것만 같다. 또한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경쟁자이자 고통을 분담하는 동료로 여길 수 있지만, 수영장에서는 수영만 하자라는 결연한 의지가 강하게 흐른다.
수업이 끝난 후, 거죽만 대충 챙겨 나와 수영장 입구에 놓인 벤치에 앉는다.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고개가 이끄는 이곳저곳에 시선을 둬 본다. 그러다 나는 '너 여기에서 자랄 수 있겠니?'라고 묻듯이 내 가슴속에 숨 쉬는(다행히 아직까지는) 작고 소중한 의지를 살짝 들여다본다. 삐딱한 눈을 뜬 의지는 그 물음이 귀찮다는 듯이 내게 요구한다.
'일단 돈을 좀 써 봐.'
이대로 포기할 수 없는 나는 의지의 말을 잘 듣기로 한다. 휴대폰 화면을 켜서 눈여겨보던 수영복을 주문한다. 맹세코, 정말, 절대로 사사로이 갖고 싶어서 산 것은 아니다. 그렇게 의지를 키워야 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수영복을 산다. 충만한 의지를 갖고서 뛰어들 교정반 레인을 상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