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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dsommar Sep 16. 2021

The Bridge로 보는 일상과 방역의 균형 찾기

사회가 부담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위험에 대한 합의가 필요합니다

노르딕 누아르, 스칸디나비안 누아르 등으로도 불리는 북유럽 범죄 수사물의 대표작 <Bron/Broen>은 공감능력에 장애가 있는 주인공 사가 노렌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경찰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사건 이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수사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가령, 범죄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심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앰뷸런스를 통과시키지 않거나,

규칙을 지켜야한다는 강박이 있는 사가 노렌은 범죄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앰뷸런스조차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증거 조사를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장례식을 마치고 화장터로 향하는 시신을 다시 경찰서로 가져가기도 하죠. 아무리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사건 관계인 입장에서는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경찰임이 틀림없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곧 화장할 예정인 시신도 예외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동료들 사이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비록 약간 특별할 뿐,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기행을 이해하고 배려해주죠. 그의 상사였던 한스와 린, 말뫼의 동료인 비욘, 코펜하겐 경찰 마틴과 헨릭 등 모두가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해줍니다.


이 때문에 동료 비욘은 위협을 받는 사가를 걱정해주고,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해주죠.

Björn은 사가와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해줍니다.

<The Bridge>가 10년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이 드라마가 잘 만들어진 범죄 수사물임과 더불어, 주인공 사가 노렌의 성장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 4개의 시즌 동안 다양한 사건과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사가의 모습은 시청자들을 즐겁게 만들어주고, 사가라는 인물에 입체성을 부여해줍니다.


하지만 그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그가 사실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동료들과는 달리, 앞에서 마주한 앰뷸런스에 타고 있는 보호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장례까지 망쳐진 유족 등은 사가에 대한 기억이 좋을 수가 절대로 없겠죠?


전문가들의 선의를 믿지만,


코로나19 통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 통제조치들은 보건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 정부가 집행하고 있고, 각종 통제조치를 기획한 보건 전문가들의 선의는 알고 있습니다. "사회의 충격을 가능한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는 선의의 대명제는 모두가 공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정부와 전문가들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이 사태를 해결하고 싶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수사에 집중하 과정에서 수사와 관계되어 있는 "사람"을 못봐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는 사가 노렌처럼 우리의 보건 전문가들도 "질병"에 너무 집중하느라 "다른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즉, 코로나를 잡기 위해 자영업자 등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소개하기에도 너무 안타깝지만, 특히 최근 자영업자의 고통은 생계를 넘어 생존을 걱정하는 수준이고, 실제 이 생존 문제로 스러져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이제 보건 문제를 넘어 사회 전방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회 각계각층의 합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학교를 닫자"라는 의제에 대해서 보건학자들만 참여했다면 승인이 될 수도 있지만, 교육학자가 함께 참여한다면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환자의 증가라는 일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교육의 가치가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죠. 영업시간 규제 등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정책을 보건학자가 아니라 자영업자가 짠다면 상당히 다른 그림이 나오겠죠.


사회가 부담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위험에 대한 합의가 필요합니다


저 또한 보건전문가는 아니지만 위드코로나에 대한 많은 의견을 냈습니다.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코로나19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제 보건학자의 몫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정도 피해는 감수하더라도 거리두기를 완화하고 가자는 사회 전반의 합의"를 강조하신 김흥빈 분당서울대병원 교수의 인터뷰는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 코로나를 박멸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옵션이기 때문에, 어떤 위험까지 우리가 감내할 건지에 대한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규칙을 두되 자동차 운행을 금지시키지 않는 것처럼, 코로나19의 위험을 막기 위해 어느 수준에서 통제를 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위드코로나와 보건 전문가가 생각하는 위드코로나, 자영업자가 생각하는 위드코로나, 환경운동가(일회용품이 엄청나게 발생하고 있죠?)가 생각하는 위드코로나 등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적절한 공론의 장을 마련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합의를 만들어서 그것을 시행해 나가는 것은 우리 정부의 몫이겠죠. 앞으로 이런 논의가 활성화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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