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테니얼 파크 입구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캐나다 좋죠! 경치 좋고, 땅 넓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잖아요."
물론 한국보다 녹지 공간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토론토, 밴쿠버 등 큰 도시의 주거지역과 다운타운은 바쁘고 복잡한 서울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일하고, 공부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정신없이 살아간다.
서울에서 태어나 결혼 전까지 한 번도 도시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맨발로 놀이터를 뛰어다녀 본 기억도 없으며, 흙장난에 옷을 더럽혀 본 기억도 없다. 캐나다 이민생활도 도시생활의 연속이었다. 토론토와 밴쿠버에서의 시간은 한국 보다 조금 느리게 흘러갈 뿐, 나의 일상은 서울 생활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어른이 다 돼서도 공원 잔디밭을 걸을 때면 뽀송뽀송 파릇파릇한 잔디보다는 그 속에 벌레들이 먼저 보여서 돗자리 없이 바닥에 앉지 못했고, 시원한 나무 그늘 밑은 애완견들의 영역표시 자리가 눈에 먼저 들어와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만지지도 못하게 했었다. 캐나다에 살면서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아이들과 어떻게 밖에서 뛰어놀아야 하는지 잘 몰랐다.
막내가 3살쯤 되었을 때 알버타 작은 시골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엄마, 우리 동물원으로 이사 온 거야?"라고 아이들이 환호할 만큼 자연 속에 둘러싸인 아주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외국에 여행온 관광객처럼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웠다. 심지어 영어 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상황 자체가 떨리고 두근거렸다. 토론토, 밴쿠버에서는 한국 커뮤니티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영어 한마디 하지 않고도 8년이란 시간을 한국에서 처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 8년 만에 제2의 캐나다 이민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아니, 진짜 이민생활이 시작되었다.
에슨에서의 첫여름.
Centenial park에서 여름 축제가 있었다. 야외 공연장에서는 뮤지선들이 컨츄리 음악을 연주했고, 리듬에 취한 마을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춤도 추었다. 모두들 야외용 의자 또는 담요를 가지고 나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비눗방울과 풍선들,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팝콘과 솜사탕으로 공원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가장 흥분하게 만들었던 건 바로 친구들이었다. 언덕 꼭대기부터 까르르 웃으며 데굴데굴 굴러 내려오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잔디에 얼굴을 파묻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던져 굴러 내려오는 아이들과 덩달아 껑충껑충 뛰어 내려오는 강아지들은 확실히 나에게도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엄청 재미있겠는데? 나도 하고 싶은데... 엄마한테 혼나겠지?'
아이들의 눈빛에 고민이 가득했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세 아이들이 한꺼번에 언덕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신기함과 흥미로움, 어지러움과 알 수 없는 희열의 비명을 질러가며 구르고 또 굴렀다. 이렇게 우리는 시골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시골 사람들의 주말은 평일보다 더 활기차고 바빠 보였다. 사냥을 가거나, 낚시를 하고, 캠핑을 가거나, 하이킹을 떠났다. 물론 항상 가족과 함께였다. 그들에게 이러한 여가생활은 특별한 주말이 아니라 일상 중 하루처럼 보였다. 어쩌다 마음먹고 주말에 소풍이라도 가려면 전날부터 준비한다고 분주한 우리 가족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주위를 둘러봐도 산과 호수밖에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주말 잘 보내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낚시 당첨!
무엇이든 잘하고 싶은 신랑과 아들은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 새벽과 저녁시간에도 낚싯대를 들고 가까운 호수로 나갔다. 물론 10에 9는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주변 낚시꾼들의 훈수와 도움으로 점점 낚시를 즐기게 되었다. 어쩌다 물고기가 잡힐 때면 남편과 아이들은 흥분의 함성을 질러댔고 난 동시에 공포의 비명을 질러댔다.
"엄마한테 가져오지 마! 으악!"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시골생활을 쫌 즐길 줄 아는 아줌마가 되었다. 일상인 것처럼 뚝딱 챙겨서 산으로 호수로 떠나기도 하고, 준비된 장작 없이 마른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오랫동안 불을 피우는 법도 익히게 되었다. 나무 꼬챙이를 만들어 소시지를 찔러 넣는 법도 배웠으며, 노릿하고 먹음직스럽게 마시멜로를 굽는데도 익숙해졌다.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쯤이면 하나, 둘,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아이들 다 도시로 떠나면 우리도 따라가야겠지?" 문득 둘만 남은 집을 생각하니 외로움이 밀려왔다.
"무슨 소리야. 아이들 결혼하고 손주들 생기면 할머니, 할아버지 만나러 시골에 놀러 오는 맛이 있어야지."
벌써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타령으로 앞서가는 신랑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지금 속도처럼 시간이 빨리 흐른다면 그런 순간도 머지않아 곧 찾아올 것 만 같았다. 잠깐의 침묵 후 신랑의 말이 맘속 깊이 내려앉았다.
"사람은 힘들고 지칠 때 돌아갈 수 있는 고향집이 있어야 해. 우리가 이곳에서 아이들의 고향이 되어줘야지."
오랜만에 신랑과 같은 생각을 했다. 한국의 엄마집이 참 그리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