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독특하고 개성 있고 때로는 이해 불가능한 아이들을 선물로 주셨다. 겨울에 흩날리는 눈송이조차 모두 다른 패턴을 가지고 있듯, 아이들도 자기만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다.
"너 어렸을 때 이야기 하려면, 책을 10권을 써도 모자라지."
고집세고 극 예민한 큰딸에게 종종 했던 이야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 있게 내밀 증거가 없다. 과거 그때 그 시간을 기억해 줄 동네 어르신들도 계시지 않고,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꾸준하게 글로 담아 오지도 않았다. 증거 불충분이다.
아이 때문에 너무 속이 상할 때, 이 세상에 이런 속앓이 하는 건 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더 억울해진다. 하소연할 상대도(신랑한테 이야기해 봤자 싸움으로 번질 것이 뻔하다.), 원망할 대상도(아이한테 이야기해 봤자 엄마의 잔소리로 들릴 것이다) 없다. 그럴 때면 부모에게 얼굴 생김새, 체형, 체질, 성격 심지어 버릇까지 복사해서 전달된다는 유전자를 따져본다. 내 아이가 이렇게 유별난건 분명 날 닮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여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벼워지기 위함일까?
아이 셋, 독박 육아를 하며 알게 되었다. 내 새끼들, 분명 나와 닮은 듯 하나, 나를 전혀 닮지 않았다. 아마도 많은 엄마들이 맞장구를 치며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고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난,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와도 크게싸우며, 갈등을 일으켜 본 적이 없다. 상대방이 좋다면, 나도 좋고, 우리 모두가 좋다면 그게 좋은 거다. 난 평화주의자다. 늘 먼저 양보하고 상대방의 요구에 맞춰주면 만사가 편안했다. 내가 화를 낼 수 있다는 사실, 나도 누군가에게 화를 내며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은 결혼 후 신랑을 통해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난 웬만하면 아프다는 이야기도, 불편하다는 이야기도 잘하지 않는다. 갈비뼈가 4개나 부러졌는데도 하이킹을 가고 스키를 탈만큼 웬만하면 아픈걸 꾹 참는 미련하도록 둔한 곰 중에 대왕곰이다.(갈비뼈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부러진지도 몰랐다. 다행히 갈비뼈는 잘 붙었다.) 내 삶에 까칠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물론 뇌피셜이다.)
우리 아이가 어땠는지 넋두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출산한 우리들은 모두 초보엄마였다. 똑같은 배에서 3명의 아이가 태어났어도, 한 식탁에서 같은 밥을 만들어 먹여도, 3명 제각기 다른 식성과 입맛을 가지고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똑같은 수위의 잔소리를 해도 돌아오는 아이들의 반응이 모두 다르니 환장할 노릇이다. 아마도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이 가지고 있는 에피소들을 모아본다면 결코 끝나지 않는 에세이 연재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딸은 나를 닮지 않았다. 아빠 닮았다는 이야기를 제일 싫어하는 딸은 미안하게도 외형이나 성격, 심지어 피부색까지 아빠와 똑 닮았다. 신랑 하고는 이렇게 저렇게 서로 알아가고 맞춰가며 원만한 공동생활(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평생 사춘기인 것처럼 조심스럽고 예민한 이 생명체와의 관계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가끔은 양가 부모님들께 국제전화로 징징대며 어리광을 부릴 때도 있었다.
"힘들겠다, 수고한다, 고생한다."라는 한마디 위로가 필요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서로 발뺌하기에 바쁘셨다.
"그래? 이상하네... 넌 안 그랬는데. 윤 서방 닮았나 보다. 너는 정말 순했다!"
"그래? 우린 아기가 그렇게 유별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본다. 우리 애들은 다 순했는데, 어멈 네가 어렸을 때 까칠했나 보구나!"
모두가 본인의 아이들은 까칠하지 않고 순한 아이였다고 하셨다. 증거 불충분이다. 부모님들은 우리의 모든 성장 과정들을 사랑이라는 큰 마음의 박스에 담아두시고, 눈물 나도록 힘들었던 그 시간들은 모두 잊으신 거다. 아니, '아이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다.'라는 짧은 문장 속에 힘든 기억들은 함축시켜 넣어두셨다. 담아두신 사랑의 박스가 얼마나 큰지 힘든 시간들은 무게감도 존재감도 빛을 바라지 못한다. 나만해도 그렇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큰딸을 보며 힘들었던 시간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슴 벅차도록 사랑스럽고 뿌듯한 감정만이 가득했다. 예전의 맘고생은 밀려드는 파도에 깨끗해진 모래사장처럼 다시 말끔하게 포맷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섭섭하게 했던 신랑의 과거들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잊히지 않고 문득문득 떠올라 죄 없는 신랑에게 뜬금없이 눈을 흘기게 만드는데, 자식을 향한 부모의 기억력이란 어찌 이리도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걸까?
유아시기를 거쳐 청소년, 청년 시기에 접어든 아이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엄마>의 위치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양육자, 보호자였다면 지금부터 <엄마>의 위치는 위로자, 격려자, 후원자, 삶의 멘토가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욕심 없고, 가장 꾸밈없고, 가장 솔직할 때가 언제였을까? 바로 어린아이였을때다. 태어난 성품대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숨김없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런 깨끗한 아이에게 우리는 부모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색깔대로 옷을 입히고, 교육을 시키고, 삶을 연습시켜 왔다. 어쩌면 슬프게도 일률적으로 세상에 흡수되기 적합한 아이로 만들어 가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아이들이 창의성이 없다며 머리를 쥐어짤 때, 본인은 의지력이 너무 약하다고 자신을 원망할 때,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방황할 때, 나 때문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먼 훗날, 나에게도 손자, 손녀들이 생길 것이다. 부모가 된 아이들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힘들다고 투정도 부릴 것이다. 어쩌면 그때는 나도 부모님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 "너희는 순했다!"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에 딱 한번 있는 유아시기, 아이들의 사춘기 시기, 그리도 대학입시와 첫사랑, 이 모든 아이들의 시간들을 기록으로 잘 남겨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제대로 된 증거를 통해 과거를 함께 회상하며 순간순간마다 나의 미숙함으로 제때 해주지 못했던 말들을 늦게 마나 해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글 쓰는 게 어색하고, 어렵고, 재능도 없지만 꾸준하게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