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버타 에슨 시골마을 나는 시골마을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오전수업이 없는 수요일은 5세 미만, 미 취학 아동을 위해 family literacy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캐나다는 만 5세가 되면 Kindergarten에서 정규교육을 받게 된다. 각주(Province)에 따라 4살부터 정규교육이 시작되는 곳도 있다. 캐나다가 좋은 이유는 마을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무료 교육기관이 많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이라면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아이들을 사립 교육시설에 보내겠지만 우리처럼 하루 살아가기도 벅찬 빠듯한 이민자들에게 사교육은 쉬운 결정이 아니기에, 이런 무상교육기관은 좋은 학교이고, 좋은 놀이터가 된다. 아이들을 프리스쿨이나 데이케어에 보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 나도 정부에서 운영하는 무료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문화를 경험하고 영어를 배워갔다. 열심히 프로그램에 참여한 결과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으니 난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정부에서 Family Literacy Program을 운영하는 이유는 가정 속에서 올바른 생활환경과 학습 환경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5살 아이들의 수준은 다 비슷비슷하겠지.'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첫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의 학습 능력과 사회 적응력은 꾀나 큰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의외로 집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아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또한 이런 아이들을 위한 추가교육비용도 정부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은 큰 지출이라고 한다. 정부가 후원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미취학 아동이 집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색, 도형, 숫자, 문자, 문제해결능력, 사회성 등을 학습할 수 있도록 돕는 부모와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설명은 거창하지만 놀이를 통하여 학습을 하는 아이들을 위해 어떤 놀이를 해야 하는지 정보를 제공하고 실습하는 곳이다. 사실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노래하고 책 읽고 게임을 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이러한 목적으로 우리 마을보다 더 작은 시골마을로 출장(?)을 떠난다.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일도, 박스 한가득 무거운 교구들을 옮기는 일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도 나에게는 선물 같은 기회이기에 이 시간이 참 감사하고 행복하다.
단, 운전을 빼면 말이다.
난 운전을 아주 잘한다. 자동차 보험회사에서도 최고 운전자 우대할인을 받을 만큼 무 사고, 무 벌점 모범 운전자다. 그러나, 난 길치다. 아주 심각한 방향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내비게이션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얼마나 큰 행운이고 다행인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내비게이션은 언제나 든든한 나의 친구이자 안내자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알버타 시골에 살다 보니 간혹 타운을 벗어나 지방도로나 비 포장도로로 접어들 때면 내비 속 자동차 아이콘이 갈길을 잃고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 때가 생긴다. 분명 난 도로 위에 있건만 길이 사라져 버린 스크린에서는 어디에 바퀴를 올려놓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자동차가 왼쪽, 오른쪽,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뱅글뱅글 제자리 회전만 할 뿐이다. 네비가 못 찾는 길도 몇 번 가다 보면 길을 외울 법도 한데, 심각한 방향치인 나는 좌회전, 우회전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방향감각을 상실한 체 패닉에 빠져버린다. 내가 달리는 곳은 길이요, 내 옆에 서있는 것은 모두 똑같아 보이는 나무들 뿐이니 말이다.
오늘은 피얼스(Peers)에서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다. 사실 이곳은 오늘로 5번째 방문으로 신랑의 표현으로는 그 정도 다녀왔으면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딱 두 번의 좌회전만 하면 짠! 하고 나타나는 새로 지은 크고 멋진 빌딩이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가는 길을 떠올려보았다. 내비 없이도 거뜬히 찾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지막 수업은 내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나 혼자만의 힘으로 다녀오고 싶었다. 용감하게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자신 있게 달렸다. "오예! 출발~"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의심의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직진만 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에서 왼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래도 계속 달렸다. 사실, 직진밖에 길이 없었다.
"내가 지나쳤나? 이정표가 왜 안 나오지? 원래 이정표가 없었나?"
내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운전을 해서 그런지 좌회전할 때 이정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여기 내가 처음 와본 것 같은데? 내가 뭘 놓친 거지?"
급기야 길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도로 위 눈에 익은 작은 힌트라도 찾아보려고 했으나 내비밖의 세상은 너무나 생소했다. 의심이 시작된 순간부터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좌회전으로 들어가야 할 지점을 놓쳤다고 확신했다. 위험했지만 갓길에 차를 세웠다. 무턱대고 직진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비를 켰다. "헉! 뭐야! 25분이나 달렸는데 다시 20분을 뒤로 돌아가라고? 그것도 고속도로가 아니라 비포장도로로? 30분이면 도착하고도 남을 곳인데 20분을 더 가야 한다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난 이미 지각이다. 급하게 프로그램 담당자 Jenna에게 늦을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내비가 가르쳐 주는 대로 차를 돌려 아주 낯선 길로 들어섰다. 계속 직진만 했으니 유턴해서 직진으로 돌아가면 놓쳤던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내비를 믿고 따라가기로 했다. 나의 신뢰에도 불구하고 내비는 가뜩이나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나를 수풀이 우거진 비포장 도로로 내몰았다. 유턴해서 직진 후, 우회전을 시키고는 그것도 모자라 좌회전 한 번과 두 번의 우회전을 더 요구하였다. 대답 없는 내비에 폭풍 질문을 퍼부었다.
"이길 맞는 거야? 제대로 가고 있는 거야?"
"이런 야산과 농장사이에 커뮤니티 센터가 있단 말이야?"
"설마...곰 나오는건 아니겠지?"
그러나 다시 시작된 의심으로 차를 세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냥 우직하게 네비를 믿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어찌 되었든 이 녀석은 배신하지 않고 날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지금으로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는 차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는 숲을 돌아 나오니 거짓말처럼 커뮤니티 센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 프로그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말이다.
길을 잃은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상식적으로 지났던 길을 유턴했다면 우회전 만으로도 쉽게 갈 수 있었던 길이 었을 텐데, 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게 한 내비게이션에게도 화가 났다. 내비를 다시 열어 왔던 길을 살펴보았다. 뺑뺑이를 돌려도 정도껏 해야지. 30분 거리를 5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우회전, 좌회전을 반복하며 날 돌리고, 돌리고, 또 돌린 것이다. 더 억울했던 건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갔더라면 눈에 익숙한 좌회전 사인이 나타났을 것이고, 내비 없이도 센터에 도착했음을 뿌듯해하며, 여유롭게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뼛속까지 길치인 내가 누굴 원망하겠는가!
오늘의 비극은 스스로를 의심했던 그 순간부터였다. 결국 자신을 믿지 못하고 차를 돌렸으니, 360도 방향이 바뀐 상태에서 위성은 최선의 길을 제시했을 것이다.
"어라? 이 녀석 왜 오늘은 가던 길로 안 가려고 하지? 다 왔는데 이제 와서 차를 돌린다고?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오늘은 둘러둘러 지방도로를 타고 가야겠구먼" 하고 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가져온 참사였다. '내가 길을 놓쳤나?'하고 의심하는 순간, 길 위의 모든 것들이 처음 보는 새로운 풍경으로 바뀌었다. 작은 의심이 이렇게 까지 스스로를 두렵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똑같겠지? 누군가를 의심하는 순간 모든 스토리가 그 의심에 딱딱 맞아떨어지며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는 관계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혼란과 상처를 가져올 것이다. 의심이라는 이 작은 불씨는 참 큰 힘을 가졌다. 마지막 프로그램을 무사히 마무리했음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비야 오늘도 고마웠다.